처음엔 그녀가 내 방식에 적응하기를 바랐다.
날씨는 흐렸다.
하지만 바다 위를 스치며 불어오는 바람이, 그녀의 굳은 표정을 조금씩 풀어주고 있었다. 하늘은 천천히 파랗게 개어갔고, 그녀는 몇 번이나 내 옆을 힐끗 바라봤다. 마치 이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어도 되냐고 묻는 듯한 시선이었다. 그리고 수많은 배낭여행자들 사이를 헤치며 우리는 피피섬에 닿았다. 나도 처음 마주하는 섬이었다. 배에서 내려 좁은 골목을 걸을 때, 마침내 그녀의 입에서 첫 미소가 터져 나왔다.
“여기까지 온 이유를 알 것 같아요.”
지난밤의 방콕공항, 푸켓 공항, 그리고 ‘가까운 항구’.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불안에 휩싸여 있던 그녀는, 이제 골목을 누비며 가벼운 발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무계획의 여행이 선사하는 예측할 수 없는 기쁨.
그 아슬아슬한 자유가, 그녀의 얼굴에도 조금씩 번지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안도했다. 솔직히, 처음엔 그녀가 따라올지 확신이 없었다. 내 안에서는 늘 “나 혼자면 더 편한데”, “왜 굳이 맞춰줘야 하지” 같은 이기적인 계산이 앞섰다. 그건 찌질한 방어 기제였다. 결국 그녀가 내 방식에 적응하기를 바랐고, 잘 따라주면 다행이라는 생각만 했다.
하지만 그날, 좁은 골목 사이를 경쾌하게 걷는 그녀를 보며 처음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함께 걸을 수도 있구나.’
그제야 조금씩 그녀의 속도를 의식하기 시작했다. 한 발짝 느린 그녀의 리듬에 맞춰, 나도 걸음을 늦췄다.
함께하는 여행은 생각보다 훨씬 더 어렵다. 대학교 시절, 가장 친했던 친구와도 여행하며 수도 없이 다퉜다. 보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 먹고 싶은 메뉴, 사진 찍는 속도까지. 사소한 차이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서로를 긁었다. 결국 마음 상한 채 돌아온 적도 많았다. 유럽여행에서 만났던 일행들도 마찬가지였다.
자유를 위해 떠난 여행이 사람과 함께하는 순간부터 협상과 양보의 연속이 된다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혼자 여행하는 방식을 더 편하게 여겼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번은 달랐다.
처음엔 불안이 얼굴에 자주 떠올랐지만, 그녀는 그걸 조용히 삼켜냈다. 공항에서 밤을 새우는 순간에도,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표지판 앞에서도. 끝내 불평은 없었다. 때때로 불안이 얼굴에 떠올랐지만, 그 불안을 스스로 삼켜내며 내 옆에 있었다.
마침내 도착한 이 낯선 섬에서, 그녀는 그 모든 불확실함을 마치 기다렸다는 듯 자유로 바꿔버렸다. 그 자유는 나를 변하게 했다. 억지로 끌고 가던 독주가 아니라, 서로의 리듬을 맞춰가는 여행. 어색하지만, 그 속에서 나는 조금씩 ‘함께’의 의미를 배우고 있었다.
여전히 나만의 방식은 유지되고 있었다. 비행기는 따로 끊었고, 식사도 쇼핑도 반반이었다. 이 구조는 사실상 내가 만든 틀이나 다름없었다.
출발 전, 그녀가 환전은 얼마나 하면 되냐고 물었을 때, 나는 주저 없이 말했다.
“30이면 충분해요.”
그건 내 방식의 30이었다.
내 여행은 늘, 최소한의 계산으로 버티는 훈련 같았다. 공항에서 환전한 30만 원으로 나는 동남아 어디든 일주일을 버텼다. 버스 타고, 국수 먹고, 허름한 방갈로에서 자고. 정해진 예산 안에서 움직이는 게임. 딱 필요한 만큼만 쓰고, 딱 필요한 만큼만 남기는. 혹시나 몰라 항상 지갑에 넣어둔 300달러는, 몇 년째 봉투 그대로였다.
돈이 많아지면 느슨해진다. 버스를 놓치면 택시를 타고, 아무 식당 대신 검색어를 따라간다. 그건 여행이 아니라 소비다. 피로한 쉼, 과잉의 휴식. 속을 채우기보다는 오히려 허기를 키운다.
그래서 30이었다. 내게 여행은, 그런 식으로 유지돼야 의미가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그녀가 있었다. 그 사실이, 모든 걸 조금씩 어긋나게 했다. 어쩌면 나는 모른 척하며 내 방식을 고수하고 있었고, 그녀는 별말 없이 거기에 발을 맞추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도 딱 30만 원만 바꿨다. 믿음인지 아니면 무모함인지, 쪼잔 함인지... 이유야 어쨌든, 출발선은 같았다. 대신 니는 비상금 300불이 있어 나름 선심도 썼다.
방콕 공항 스타벅스 라떼 두 잔, 푸켓 공항에서 택시비.
그런데 이상했다.
모든 걸 반반씩 부담했는데, 묘하게 여유가 생긴 느낌이었다.
혼자였다면 들어가지 않았을 식당,
혼자였다면 시키지 않았을 메뉴들이 하나둘 쌓였다.
숙소도 각자 잡는 대신 하나로 합치면 조금 더 여유가 생길 것 같았다.
함께한다는 건, 그렇게 균형을 깨뜨리는 일이었다.
여유가 생기니, 이상하게 배려도 생겼다.
그렇게 함께 머물게 된 첫날밤, 배에서 내리자마자 찾은 숙소. 1박 3만 원짜리 방이었다. 물론 혼자였음 만원 안쪽에 잡았을 것이다. 외지고 허름한 곳. 여기는 내가 손해 보는 느낌이었지만, 중심가에 위치했고 아늑해 보여 조금은 설레었다.
트윈 침대를 부탁했다. 방에 들어서니 침대 두 개가 나란히 붙어 있었다.
낯선 공간 속, 아주 작은 긴장감, 어색한 거리.
나는 천천히, 말없이 침대 사이를 벌렸다. 대충 10센티미터쯤. 내 안의 찌질함과 조심스러움이 합의한 간격이었다. 그녀는 그걸 바라보다가, 슬쩍 웃었다. 그 웃음 안에 무언가 있었지만, 나는 묻지 않았다.
그녀와 나는, 아직 손을 잡기도 어색한 사이였다.
그러니까, 그 정도 거리쯤이면.
충분한 설명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침대에 걸터앉아 창밖을 봤고, 나는 괜히 바쁘게 가방을 정리했다. 바람 소리가 방 안까지 흘러들었다. 바람은 늘 타이밍 좋게 말을 대신했다.
이 여행의 끝은 어디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시작부터 애매했고, 목적지도 없었다. 그냥 흘러가는 중이었다.
관계도, 거리도, 돈도.
그녀가 침대 쿠션을 눌러보며 말했다.
“이 정도면 괜찮은 것 같아요.”
피피섬의 누볐다. 길가에 늘어선 간이 식탁에서 음식을 먹고, 모래 위에 누워 바닷바람을 느꼈다. 그녀는 이제 완전히 여행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처음의 긴장은 사라지고, 작은 일에도 쉽게 웃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조금 더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라면 절대 들어가지 않았을 여행사에 발을 들였다. 섬 투어, 비밀 해변, 스노클링, 가벼운 트래킹. 처음엔 ‘굳이 이런 걸 해야 하나’ 싶던 내 안의 옹졸함이, 어느새 ‘함께라면 해보고 싶다’로 바뀌어 있었다.
밤이 되자 맥주가 시원했고, 해산물은 싱싱했다. 합쳐진 예산만큼 식탁은 풍성해졌다. 전날 공항 바닥에 몸을 웅크리고 있던 우리를 생각하면, 이 밤은 거의 축제에 가까웠다. 그 순간만큼은, 태국에서 가장 부유한 배낭여행자가 된 기분이었다.
남은 건 내일의 숙소였다. 비싼 숙소는 이제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사실 구할 생각도 없었다. 오늘을 충분히 즐기고, 내일을 가볍게 맞이하는 것. 그게 이 여행의 전부라는 걸 그녀도 알고 있는 듯했다.
그녀가 웃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내일이 조금 기다려졌다.
어디로 가든, 무엇을 하든, 그 모든 선택이 덜 두렵고,
처음으로 그녀와 함께가, 조금 설레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