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 4.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건

관계의 깊이를 견디다.

by 남해바다

이른 아침,

피피섬의 햇살이 골목을 깨우기 시작할 무렵, 우리는 숙소를 나섰다.


오늘은 섬 투어를 가는 날이었다.

배에 오른 이들은 국적도, 표정도 달랐지만,

눈빛만은 모두 같았다.

기대와 불안, 그리고 알 수 없는 설렘이 공존했다.


첫 번째 정류지에서 스노클링이 시작됐다. 패키지 투어였다면 구명조끼 착용은 필수였겠지만,

여긴 태국 자유여행. 모험과 자유가 룰이었다.


구명조끼는 단 2개. 말 그대로 구조용이다. 그녀에게 물었다.

“처음인데 구명조끼 없어도 괜찮겠어요?”


그녀는 잠시 망설였지만, 금세 고개를 들었다.

“나 수영 잘해요. 괜찮아요.”


한 번 더 확인했다.

“실내 수영장이랑 바다는 완전히 달라요. 내가 스테프에게 부탁해볼게요.”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어린아이들도 맨몸으로 뛰어드는 바다였다. 자존심일 수도, 단순한 오기가었을 수도 있었다.

나는 웃통을 벗고 수경과 오리발을 착용한 뒤 바다로 뛰어들었다. 맑은 물 아래, 산호와 물고기들이 춤추고 있었다. 잠시 수면 위로 올라와 그녀에게 손짓했다.


주저하던 그녀가, 마침내 몸을 웅크리더니 그대로 바다 속으로 뛰어들었다.

"우퍼, 우퍼"


수면 위로 들려오는 그녀의 짧고 거친 숨소리. 다급했다. 망설일 틈도 없이 힘껏 물살을 가르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눈은 놀람과 공포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의 어깨를 붙잡자, 그제야 비로소 나를 보았다. 그 순간, 스태프가 다가와 그녀를 배 위로 끌어올렸다. 배 위에 올라선 그녀는 한동안 떨고 있었다. 처음 맛보는 깊은 바다는, 그녀에게 단순한 물이 아니라 끝없는 어둠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며 예전의 인도네시아 길리 트라왕안의 바다가 떠올랐다. 그때 나는 바다거북을 보기 위해, 구명조끼도 없이 바다 한가운데 뛰어들었다. 수영을 제대로 배운 적 없었고, 발이 닿지 않는 깊은 바다는 두려움 그 자체였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하니, 나 역시 무작정 몸을 던졌다. 그리고 물속 2~3미터까지 자연스럽게 가라앉아, 바다거북과 나란히 유영하던 순간. 그것은 공포와 경이 사이, 아찔하게 흔들리던 내 인생 첫 ‘진짜 바다’였다.


그 경험 이후로, 나는 구명조끼를 입지 않았다. 두려움을 덜어내는 대신, 바다의 숨결과 무게를 온몸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구명조끼 없이 마주하는 바다는, 언제나 내게 살아 있음 그 자체였다. 오늘 그녀도 그 문턱에 서려 했지만, 아직은 준비되지 않은 세계였다.


관계도 바다와 닮았다.

누구나 발끝쯤은 담글 수 있다. 하지만 깊이에 몸을 맡기는 일은, 용기와 신뢰가 필요하다. 그녀는 그 경계에 서 있었다. 나는 그걸, 느낄 수 있었다.

투어는 계속됐다.

몇 개의 섬을 더 돌고, 해변에 누워 햇살을 맞았다. 그녀의 얼굴은 점점 풀렸다. 첫 스노클링의 두려움은 사라진듯 했고, 익숙한 햇살과 바람 속에 스며들고 있었다.


마지막 코스.

가이드는 바다 한가운데서 배를 멈췄다. 고래상어가 나타날 수도 있다고 했다. 해는 이미 기울고, 바다는 서서히 어두워졌다.


그녀가 내 팔을 잡았다. 손끝에 전해지는 미세한 떨림. 나는 그 떨림을 느끼면서도, 물속으로 몸을 던졌다. 구명조끼도 없이, 한참을 헤엄쳤다.


물은 차갑고 깊었다.

호흡은 얕아지고, 시야는 흐려졌다.

바다 아래에서 매 순간 방향을 잃을까 두려웠다.

고래상어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배로 돌아왔을 때, 바다는 이미 검푸른 잉크처럼 퍼지고 있었다. 내 몸은 젖은 돌처럼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고, 팔과 다리는 서서히 저려왔다.


‘조금만 더 멀리 갔다면, 혹은 조금만 더 늦었다면…’


등골을 타고 한기가 스며들었다.


그래도 마음 한켠이 놓였던 건, 내가 혼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이었다.


멀리서도 선명하게 느껴졌던 그녀의 시선이 내 길을 밝혀주는 등불 같았다. 초등학교 시절 소풍에서 길을 잃고 한참을 울며 헤매던 나. 그리고 멀리서 두 팔을 벌리고 나를 부르던 엄마의 모습. 그 순간 가슴 속 깊이부터 퍼져 나왔던,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도 단단한 안도감. 그때 느꼈던 그 뜨거운 안심이, 지금 이 바다 한가운데서 다시 피어올랐다.


누군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그 단순한 사실이

이 깊은 바다에서,

내 온몸을 떠받치는 부력처럼 느껴졌다.


돌아오는 배에서 생각했다.

그녀와 나는 아직 서툴고, 서로를 잘 모른다.

하지만 지금,

서로의 고독과 두려움을 알아가고 있었다.


같은 길을 걷는 사람이 아니라,

조금씩 서로의 중심을 지탱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