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와 우연히 아프리카'를 핑계삼아
스마트폰 전자도서관 앱을 무심히 뒤적이다가, 『그와 우연히, 아프리카』라는 책을 발견했다. 제목은 낯설었지만, 손가락은 이미 ‘대출하기’를 누르고 있었다. 첫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부터, 나는 이미 거기에 있었다.
전반부는 저자가 혼자 아프리카를 여행한 기록이었다. 낯선 대륙의 공기, 수평선, 말 없는 골목들. 그것은 나의 이야기 같았다. 혼자 떠난다는 것, 그 고독 속에 깃든 단단한 자유.
그런데 책이 중반을 넘어서면서 낯선 균열이 생겼다. 저자는 인터넷을 통해 한 남자를 만나고, 그와 함께 여행을 시작한다. 단숨에 읽어 내려간 두 시간. 책을 덮고 난 뒤,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나는 혼자가 아니어도 될까.’
마음 어딘가에 아주 작고 예민한 금이 간 느낌. 그 균열은 조용히 번져가고 있었다.
주말이면 소개팅이 두 번씩 잡혔다.
주변 사람들은 내가 여자친구가 없는 것을 못 견뎌 했다. 나는 묵묵히 나갔다.
30대 중반, 소개팅은 더 이상 가벼운 만남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결혼으로 향하는 입구쯤으로 여겼다. 하지만 나는 결혼을 생각한 적이 없었다. 반복되는 만남은 피로를 남겼고, 결국 마지막 한 번만 더 하고 그만두자고 결심했다.
그렇게 서른 번째쯤 되는 소개팅. 토요일 오후 1시.
찟어진 청바지, 슬리퍼.
준비 없는 복장.
준비 없는 마음.
그리고, 그녀가 나타났다.
흰색 승용차가 다가오더니 창문이 열렸다.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 운전석 쪽으로 스쳐 보이는 미니스커트. 차에 타라는 손짓.
나는 가만히 문을 열고 탔다. 앞만 보며 인근 주차장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그녀가 차에서 내리는 순간, 나는 숨을 멈췄다. 늘씬한 몸, 작은 얼굴, 그리고 지나치게 밝은 미소.
그녀는 지금껏 내가 만났던 누구와도 달랐다. 아니, 다른 종족이었다.
카페에서의 대화는 이상하리만큼 부드러웠다. 3시간 넘게 이어졌고, 헤어진 뒤에도 두 시간 넘게 통화를 이어갔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녀는 말했다.
“내일 또 만나요.”
하루 하루가 설램으로 가득했다. 늘 퇴근 시간이 기다려졌고, 주말이면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새로운 인생이 열렸고, 새로운 희망이 생겼다. 인연이란 것이 그렇게 많은 것을 바꿨다.
그녀는 매일같이 내 주변에 와 주었다. 대화는 끝이 없었고, 멈출 기미도 없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내 안에서 뭔가가 불안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친절은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빛은 모든 사람에게 고루 쏟아졌다. 그녀는 아나운서 출신이었다. 훈련된 목소리, 어디서든 빛나는 미소, 누구에게나 자연스러운 친절. 그녀는 모두에게 사랑받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한 달쯤 지났을 때, 회사에서 뮤지컬 관람 행사 공지가 떴다. 연인을 동반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망설이는 나를 보며, 그녀는 말했다.
“당연히 가야죠. 오빠가 어떤 사람들과 일하는지 보고 싶어요.”
공연장에 들어선 순간, 공기가 바뀌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빛나는 원피스,
밝은 미소,
놀람과 부러움이 뒤섞인 시선들.
나는 그 자리에 있으면서도, 투명 인간이 된 기분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은 그녀만을 향했고, 나는 옆자리에 선 매니저, 아니 카메라처럼 느껴졌다. 우월감과 열등감이 동시에 소용돌이쳤다.
공연 후 이어진 술자리에서, 그녀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사람들과 어울렸다. 그녀의 다정함은, 내 것이 아니었다. 모두의 것이었다. '같이 있음'이 '더 외로운 상태'가 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인상을 쓴 채 그녀를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돌려보냈다.
다음 날, 전화를 걸지 않았다. 미안함, 혼란, 그리고 자존심이 손을 막았다. 그녀의 부재중 전화가 쌓여갔지만, 손끝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 겨우 용기를 내어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놀랍도록 아무렇지 않게, 여전히 웃고 있었다.
“우리 내일 밥 먹어요.”
그녀의 빛이 너무 강해, 나는 그림자처럼 작게 느껴졌다.
함께 있을 땐 괜찮았다. 웃음도 있었고, 침묵도 어색하지 않았다. 하지만 혼자가 되는 순간, 마음이 조용히 무너졌다. 사소한 말에 의미를 덧씌우고, 틈만 보이면 불안한 상상을 밀어 넣었다.
그 상상은 늘 같은 방향이었다. 끝이 보이면 불안했고, 가까워질수록 겁이 났다.
그래서 내가 먼저 거리를 두었다. 덜 아플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상처도, 수치심도, 내가 통제할 수 있다고 착각했다.
결국, 가장 비겁한 선택. 내 안의 열등감은 마지막 결정적인 한 문장을 뱉어냈다.
“우리,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요.”
우리는 한 달 동안 매일같이 만났지만, 손 한번 잡지 않았다. 끝까지 존댓말을 썼다. 어쩌면 그녀도 이미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녀는 한참을 침묵하더니, 조용히 말했다.
“그래요. 그럼 편하게 연락하면서 지내요.”
홀가분한 듯, 쓸쓸했다.
그렇게 내 인생에서 가장 화려했고, 가장 잔혹했던 한 달이 막을 내렸다.
심리학의 애착 이론 중 ‘회피형 애착’이라는 말이 있다. 가까워질수록 본능적으로 거리를 두고 싶어지는 사람들. 사랑이 깊어질수록 커지는 불안을, 차라리 멀어짐으로 덜어내려는 방어 본능.
실제로 거리를 두자 마음이 이상하리만치 편해졌다.
나는 참 비겁하게도, 홀로 있는 쪽을 택했다.
2주 뒤, 금요일 밤 10시.
익숙한 이름이 스마트폰에 떴다.
“예전에 오빠 단골이라고 했던 클럽 기억나요? 친구들이랑 왔는데, 나올래요?”
나는 나갔다. 거절할 수 없었다. 아니,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화려한 드레스, 웃음, 벤츠.
다시 낯설고도 익숙한 세계에 발을 들였다.
내가 자주 가던 카페로 그들을 이끌었다.
어두운 조명, 잔잔한 음악, 느긋한 셀프 서비스.
나의 공간.
그녀들은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눴고, 나는 음식과 맥주를 날랐다.
내가 자리에 앉자, 그녀가 말했다.
“소개팅 해볼래요? 오빠랑 잘 맞을 것 같은 친구가 있는데.”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녀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당황스러웠다. 섭섭했다. 내 자리를 다시는 넘보지 않겠다는 선언처럼 들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편으론 마음이 놓였다. 그래, 이렇게 끝나면 덜 복잡할지도 모른다. 또 한편으론, 그녀들이 말하는 그 ‘잘 맞는 친구’가 누군지, 문득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며칠 뒤,
가장 비싼 정장과 드레스 셔츠,
평소 잘 차지 않던 시계,
아끼는 구두를 꺼냈다.
약속 장소에 도착하자,
그녀는 소박했고, 조용했고, 조용히 미소 짓는 사람이었다.
예상과 달랐지만,
그래도 혹시.
한 번 더 만나기로 했다.
그리고 세 번째 만남.
나는 혼자 떠났던 여행, 계획 없는 여정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우연히, 아니 어쩌다『그와 우연히, 아프리카』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다, 불쑥 말했다.
“며칠 뒤 태국 가는데, 같이 갈래요?”
속으로 '뭐하는 짓이냐'고 스스로 되물었고, 도망치고 싶었지만, 담담한 척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잠시 당황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고민해볼게요.”
이미 엎어진 물, 나는 설마하며, 무심한 듯 한 마디 더 던졌다.
“갈 생각 있으면 표 끊고, 배낭 하나만 들고 인천공항으로 나오시면 돼요.”
그런데,
며칠 후,
그녀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표 끊었어요.”
'기뻐해야 할까? 슬퍼해야 할까?'. 혼돈의 감정.
이게 시작인지, 끝인지, 아무것도 가늠되지 않는 상태.
아무튼 그렇게, 나는 새로운 여정의 문 앞에 서 있었다.
‘누군가와 함께한다는 것’의 시작은
혼자와 둘 사이, 그 애매한 경계 어딘가를
'그녀와 우연히 아프리카'처럼 무언가를 핑계삼아
슬쩍 찔러 보는 일인지도 모른다.
혼자 떠났던 사람.
누구와도 거리 두는 것이 편했던 남자.
그 남자가 이제는 '그녀'가 아닌 '그녀'와 함께 길을 걷는다.
그녀가 아직도 왜 나와 여행을 떠났는지 이해할 수 없는,
그 여행 이야기를 하려 한다.
이제부터는,
우연이 아니라 선택으로 이어진 여정의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