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 3. 평화와 소음 사이의 가족

카타비치로

by 남해바다

3-1. 그날, 평화를 택했다.


카오락에서의 세 번째 아침.


조용했던 바닷가와 나무 그림자 아래의 수영장.

리프 오션사이드 리조트에서의 평화는 어느덧 끝자락에 와 있었다.

어젯밤, 우리는 특별한 대화 없이 다음 목적지를 정했다. 자연스럽게, 신혼여행지였던 푸켓의 카타비치로 향하기로.

문제는, 이동 수단이었다.


아내는 단호했다.
“시원한 에어컨, 렌트카.”

나는 고개를 저었다.
“로컬버스. 진짜 여행은 발로 하는 거야.”


둘이 여행 때도 이곳에서 푸켓 공항까지 버스로 이동했다. 그땐, 아내도 느림에 꽤 익숙한 편이었다. 지금은…여유라는 게 어디로 갔는지 잘 모르겠다.


아내의 표정은 ‘또 시작이구나’였다. 결국 합의는 없었다. 그저 내 쪽으로 기울어진 일방적 타협. 아내는 더 이상 말로 싸우지 않았다. 대신, 가볍게 웃었다. 그 미소의 뜻은 분명했다.


'짐 옮기는 건 당신 몫이야!'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고집에 취해 트렁크의 무게를 깜빡한 걸.

직원은 우리가, 아니 내가 짐을 들고 정류장까지 걸어갈까 봐 카트를 불러줬다. 알았더라면 당연한 서비스였겠지만, 몰랐기에 더 고마웠다. 기대 없는 친절은 언제나 깊다.


정류장은 간이 의자 몇 개가 전부였다.

표지판도, 시계도, 안내도 없었다.

“1시간쯤이면 올 거예요”

그런 말은 대개, '최대치'다.


아내의 표정에서 점점 빛이 사라졌다.

아들은 잠시 뛰더니 지쳤는지 내 손을 잡고 말했다.

“심심해…”


덥고 습한 공기.
식은땀이 옷을 눅이듯 스며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싫지 않았다.

기억은 늘, 완벽함보다 어색함 쪽에 남는다.

이 순간도 언젠가, 웃으며 떠올릴 거라 믿었다.

그곳은 ‘정류장’이 아니라, 기다림의 공간이었다. 버스가 오면 손을 흔들어 세워야 했다. 나에게 익숙한 일이지만, 이날만큼은 긴장이 필요했다. 나는 군 시절 헌병으로 돌아간 듯, 도로를 응시했다. 버스를 놓치면, 평화도 철학도 무너지는 날이었다.


다행히 30분쯤 지나 버스가 왔다.

나는 고요하게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티켓을 사자 생수 한 병이 딸려왔다.

총 330밧트. 한 사람당 4,000원 남짓.

렌트카 비용의 10분의 1.

내 고집은 비싸게 굴지만, 싸게 먹힌다.

버스는 느릿하게 푸켓을 향해 나아갔다. 창밖의 야자수들이 영화 속 장면처럼 미끄러졌다. 나는 천천히, 평화라는 이름의 풍경 속으로 진입했다.


나는 버스를 좋아한다.

정확히 말하면, 버스를 타고 가만히 있는 그 시간을 좋아한다.

길면 10시간도 좋다.

누군가에겐 고역일 긴 이동이, 나에게는 일종의 해방이었다.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자유.

도착하지 않아도 괜찮은 안도.
밖에서는 풍경이 움직이고, 안에서는 내가 멈춘다.


누군가는 묻는다.

“10시간이나 버스를 어떻게 타?”


그럴 땐 웃으며 대답한다.

“그 시간이 가장 편안해."


버스는 내가 세상과 거리를 두는 조용한 성소였다.

음악도, 대화도 필요 없는 시간.

창문 너머로 펼쳐지는 낯선 풍경들 사이로 생각들은 천천히 흐른다.

졸음이 스며들면 잠에 들고, 휴게소에 내리면 따뜻한 국물로 속을 달랜다.

그렇게 시간을 안고 달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 평온도 오래가지 않는다.

한 시간이 지나면 풍경은 반복되고, 세 시간이 지나면 회의가 몰려온다.

다섯 시간 쯤 지나면 지난 세월이 떠오르고, 그리움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고, 가슴이 먹먹해져 배낭을 부여잡는다.


지나간 말들, 하지 못한 고백들, 참았던 눈물들.

모든 감정이 긴 진동 속에서 흔들리고, 비워지고, 소멸된다.

그 시간은 여행에서만 누릴 수 있는 호사였다.


지금도, 여전히 버스는 나에게…

작은 손이 나를 당겼다.


“아빠… 오줌 마려워…”


내 평화는 그렇게 깨졌다.

생수병을 비우고, 임시 화장실로 변신시켰다.

이 순간, 가장 필요한 건 침착함과 집중력.


아내는 그런 나를 보며 한마디 했다.

“그러게 렌트카 타자니까.”


명백한 승리 선언.

그저 어색한 웃음으로 응수했다.


가족 여행이란, 평화와 혼란이 나란히 앉은 풍경 같은 것.
그리고 그 두 가지를 모두 품는 건 언제나 아빠의 몫이다.

2시간쯤 지나 푸켓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그리고 나는 고집을 내려놓았다.

혼자였다면 다시 버스를 탔겠지만, 가족의 평화를 위해 이번엔 택시를 탔다.

버스에서 예약한 센타라 카타 리조트에 도착하자 풍경은 완전히 바뀌었다.

층층이 쌓인 건물, 북적이는 수영장, 거리마다 빼곡한 상점과 사람들.


카오락의 고요와는 결이 달랐다.

2시간 남짓 거리.

국경을 넘은 것도 아닌데, 전혀 다른 나라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수영을 하고, 쇼핑을 하고, 저녁을 먹고, 마사지를 받았다.

모든 것이 꽉 찼고, 하루는 순식간에 지나갔다.


밤이 깊어졌다.

아내는 휴대폰을 넘기며 말했다.

“그래도 버스 타길 잘했어. 기억엔 남겠네.”


기억에 남는 건, 늘 아슬아슬한 쪽이다.


아내의 웃는 얼굴엔, 둘이던 시절의 자유로움이 묻어 있었다.

하지만 그 자유는, 이제 조심스러움과 함께 머문다.

그건 가끔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심한 투정으로 흘러나왔다.


아내는 눈빛으로 말했다.

아이는 손으로 사인을 보냈다.


나는 그 둘을 번역하느라, 내 목소리를 잃어갔다.


가족 여행이란 결국, 서로의 결을 맞추는 일이다.

혼자였다면, 아니 둘이었더라도, 아마 고집 하나로 끝까지 밀어붙였을 것이다.

하지만 셋이 되면서, 나는 속도를 늦추고, 말투를 낮추고, 나를 내려놓았다.

내 방식의 모서리가 사라질수록, 그 자리에 가족의 체온이 들어찼다.


우리는 더 이상 ‘어디로 갈까’를 두고 다투지 않았다.

대신, ‘어떻게 함께 있을까’를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배워가고 있다.




3-2. 협주라는 이름의 '가족'


다음날, 카타비치의 햇살 아래, 우리는 가족이라는 이름의 합주를 다시 시작했다.


푸껫 남쪽 끝에 자리한 카타비치.

푸껫엔 저마다의 얼굴을 지닌 해변들이 있다. 빠통이 젊음의 숨결로 거칠게 달린다면, 카론과 카타는 한 박자 쉬어가는 숨결 같은 곳이다.

조용히 바다를 마주하고 싶은 이들에게 더없이 좋은 곳.

햇살은 구름 한 점 없이 쏟아졌고, 우리는 카오락에서 못 다 한 해변의 여운을 채우기 위해 아침부터 바다로 향했다.


모래를 처음 만난 아이는 한참을 발바닥으로 감촉을 느꼈다. 모래 위로 발도장을 콩콩 찍으며, 모래알의 부드러움에 깔깔 웃었다. 입에 살짝 닿은 바닷물의 짠맛에 얼굴을 구기다가, 얕은 바닷물 속에 몸을 맡기고는 밀려오는 파도에 소리 지르며 금세 적응해버렸다.

나는 사방으로 튀는 아이를 쫓느라 분주했고, 아내는 모래사장에 앉아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날 따라 아내의 표정에는 작은 평온이 스며 있었다.

오랜만에 자신만의 호흡을 되찾은 듯한 얼굴.


그 얼굴을 보며 그동안 내가 얼마나 육아를 외면했는지,

그리고 아내가 얼마나 지쳐 있있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햇살이 너무 강해 오래 버티진 못했다.

한 시간쯤 바닷물과 모래를 오가다, 숙소로 돌아와 이번엔 수영장으로 무대를 옮겼다.


수영 후엔 자연스럽게 배가 고파졌다. 한국에서 가져온 전기포트에 라면을 끓였다. 수영 후 먹는 그 "라면"은 어느 별미도 흉내 낼 수 없는 깊은 맛이었다. 뜨거운 국물 한 입에 땀은 더 흘렀지만, 마음만큼은 시원하게 식어 갔다.


배를 채운 뒤엔 자연스럽게 이어진 낮잠.

아이의 잠든 얼굴을 들여다보니, 며칠 사이 어느새 태국의 작은 꼬마로 변해 있었다.


햇볕에 그을린 볼,

소금기 머금은 머리칼,

모래알이 남아 있는 손톱.


세상 어떤 부와 명예보다도 귀한 것이 내 곁에 있음이 느껴졌다.

해가 지고, 저녁이 찾아왔다.

메뉴를 정하는 일은 늘 식전 전투였다. 협상보다는 기 싸움에 가까웠다. 나는 고기를 외쳤고, 아내는 해산물을, 아이는 스파게티를 주장했다. 민주주의를 표방했지만, 현실은 독재에 가까웠다. 결국 가장 강한 목소리를 가진 아내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매번 해산물 식당의 메뉴판 어딘가에 고기 한 줄쯤 숨어 있기를 바랐다.


아이도 호락호락 물러서지 않았다.

"난 절대 안 먹을 거야!"라는 선언과 함께 침대에 누운 채, 시위라도 하듯 신발을 벗어 바닥에 툭툭 던졌다. 하지만 키즈 메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내 설득에 결국 투덜대며 일어섰다.


해산물 식당으로 향하는 길, 아이는 지금껏 먹은 스파게티 목록을 하나하나 읊으며 마치 항의 성명을 낭독하듯 구슬퍼했다.


"까보라, 아리오, 끄림 빠타, 이따리, 그리고... 그리고... 짜파게티"


뭔가 아는 듯 했지만, 정확히 알고 있는 건 짜파게티 뿐.


우연히 들어간 식당에선 마침 라이브 밴드의 연주가 한창이었다. 기타 선율 사이로 생선 굽는 냄새가 흘러나왔고, 연주는 뜻밖에 훌륭했다.

문득, 오래전 기억이 떠올랐다.


천안에서 보냈던 시절,

기타 동호회에 몸을 담았던 날들.

매일같이 연습했지만, 늘지 않는 실력에 한숨 쉬던 밤들.


양손으로 음을 꾹꾹 눌러 리듬을 만들어내는 일은 느리고, 고독한 싸움이었다. 악기를 배운다는 건 참을성의 끝자락을 붙잡는 일이라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어느 날, 공연이 잡혔고, 세 사람이 한 팀을 이뤄 합주를 준비했다. 합주는 기타를 잘 치는 것과 전혀 달랐다. 셋이 한 곡을 완성하려면, 서로의 호흡과 리듬, 감정까지 공유해야 했다.


작은 실수에도 서로를 감싸주는 시선,

눈빛만으로도 ‘지금 괜찮아?’라고 묻는 마음.

그 시간들은 음악이었고, 동시에 사람을 묶는 끈이었다.


3개월 동안 손끝이 다 헤어질 정도로 연습했던 그 공연.

무대 위에서 몇 번의 실수가 있었지만, 남은 건 기술이 아니라 함께했던 시간에서 피어난 우정과 믿음이었다.

식당 한켠에서 연주하는 밴드를 보고 있으니, 그 시절의 나와 친구들이 스쳐갔다.


혼자만의 독주는 자유롭지만 늘 외로운 싸움이었다.

하지만 합주는 불완전한 음들마저도 함께 껴안는 기쁨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여행도 그와 결은 같았다.

완벽한 박자나 정확한 음을 찾기보다는, 서로의 어긋난 리듬을 천천히 맞추고, 때로는 함께 흔들리고 웃으며 흘러가는 것. 모난 소리도, 불안한 숨결도 결국은 하나의 곡이 되었다.

그렇게, 불완전함마저 아름다운 가족이라는 이름의 합주가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음악이 잦아들고, 식탁 위 불빛도 희미해질 무렵, 우리는 천천히 일어섰다. 소화를 핑계로, 내일 머물 숙소를 둘러보기로 했다. 구경은 언제나 공짜고, 부담 없는 즐거움이니까.

그러다 발견한 한 숙소.

커다란 강처럼 수영장이 이어져 있고, 객실 문을 열면 바로 물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구조.

검색해보니 1박에 95,000원.

내가 동남아에서 묵었던 수많은 숙소 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비쌌다. 하지만, 가격을 넘어서는 기대와 두근거림이 있었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그리곤 최대한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마치 오래 전부터 이 숙소를 예약하려 했던 사람처럼, 계획된 듯, 태연하게.


그러나 손가락은 계획이 없었다.

가볍게 떨렸고, 다시 멈췄다.

이 버튼 하나가 우리 여행의 성패를 좌우할 것처럼.


아이의 발소리는 이미 수영장을 달리고 있었다.

아내의 표정은… 아주 짧게, 그러나 분명히 반짝였다.


계속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듯, 아내는 물었다.

"여기 예약할꺼야?"


이럴 땐 안다. 이미 끝났다는 걸.

나는 한숨도 없이 버튼을 눌렀다.


결정은 늘 그렇게 내려진다.
망설임 끝이 아니라, 망설임 도중에.

방에 돌아왔을 땐, 어제 맡겼던 세탁물이 말끔히 정리되어 침대 위에 곱게 놓여 있었다. 햇살처럼 뽀송한 옷을 보며, 오늘 하루를 천천히 되짚었다.


아이와 모래 위를 뛰어놀고,
수영장에서 한껏 물을 튀기며 웃고,
음식과 음악에 취하고,

그리고 서로를 바라보며 나눈 수많은 미소들.


그 모든 순간이 결국은 '가족'이라는 한 단어로 모여 있었다.


‘놀고, 먹고, 사랑한 하루.’
참, 그 말 그대로의 하루였다.


월, 화, 수, 목,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