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목적지, 푸켓 공항에서
카오락에서 마지막 점심을 먹고, 두 번째이자 마지막 목적지 푸켓 공항행 로컬 버스를 기다렸다.
여행 초반엔 공항에서, 항구에서 불안에 떨던 그녀도 이제는 표도 없이 벤치에 앉아 한참을 기다릴 줄 알았다. 기다림은 더 이상 ‘불편한 시간’이 아니었다. 파도가 해변을 다녀가듯, 시간은 제 속도로 흐르고 있었다. 버스가 오든, 길이 막히든, 시계는 우리를 재촉하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조금씩, 이곳의 느림에 몸을 맡기며, ‘조금 늦는’ 것쯤은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느림은 태도의 문제였다.
버스에 오르자 기사와 안내원은 반갑게 웃으며 외쳤다.
“지성 박! 지성 박!”
우리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마치 특별한 뉴스라도 된 것처럼. 그들은 기꺼이 가장 좋은 자리, 운전석 뒤 맨 앞 좌석을 내주었다. 아마도 그땐 로컬 버스를 타는 한국인이 드물었던 것 같다.
카오락에서 푸켓 공항까지는 한 시간 남짓한 거리였다. 그러나 로컬 버스는 세 시간이 가량 걸렸다. 기사 둘이 교대하며 운전했고, 안내원은 요금을 받았다. 버스는 길가에서 손만 들어도 멈췄고, 어디서든 사람을 태웠다.
그러다 어느 순간, 버스가 한참을 멈춰 섰다. 기다리는 사람도, 내리는 사람도 없었다. 기사 둘은 축구공을 들고 차에서 내리더니 느긋하게 공을 차기 시작했다.
한참 뒤, 안내원이 튀김 봉지를 들고 올라와 우리에게 건넸다. 웃으며 권했지만, 새벽 복통을 겪은 내겐 그림의 떡이었다.
버스가 멈춘 이유는 단순했다. 기사들이 배가 고팠기 때문. 우리가 한 시간 거리를 세 시간 동안 가야 했던 이유도 결국, 그들의 배 사정이었다.
우리는 웃었다. 상황도, 흐름도, 예측할 수 없는 이 태국의 시간도. 그리고 우리가 웃는 이유를 모르는 기사들과 안내원도 따라 웃었다.
어느 순간, 버스는 다시 멈췄다.
주변엔 아무것도 없었다.
안내원이 우리 보고 내리라고 했다. 모든 것이 기사 마음인 버스에서 우리가 기사 맘에 안 들어서 그런가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버스는 말 그대로 로컬 버스. 공항을 들리지 않고, 푸껫 끝까지 쭉 향하는 버스였다. 우리를 내려준 곳은 공항으로 가는 갈림길. 여기서 툭툭이를 타라고 했다. 황당함에 서로를 바라봤다. 아무것도 없었다. 여기에 툭툭이가 다닐 이유가 없어 보였다.
무작정 걸었다. 강렬한 태양이 내리쬐었고, 땀은 줄줄 흘렀다. 복통은 여전히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말없이 걷다가, 작은 일로 서로 언성을 높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렇게 다툴 수 있을 만큼 우린 이미 가까워져 있었다.
그때였다.
저 멀리 흔들리는 아지랑이 속에서 오토바이 한 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툭툭이었다.
마치 누군가 부른 듯, 마치 우리를 찾으러 온 듯했다. 나는 그 순간, 버스 기사가 몰래 전화를 걸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고서야 이 황량한 길 한복판에 누가 툭툭이를 보냈을까.
태국이라는곳은 아무 말 없이, 묵묵히 건네는 작은 배려가 언제나 허를 찌른다. 그들의 조용한 친절은 낯선 여행자의 마음을 다정히 어루만졌다.
공항에 도착해 그녀가 읽고 있던 책을 내밀었다.
“고령화 가족.”
낯익은 표지. 여행 내내 그녀는 이 책을 틈틈이 읽고 있었다. 그땐 단순히 좋아하는 책인가 보다 했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우리가 두 번째 만났을 때, 그녀는 내게 어떤 책을 감명 깊게 읽었는지 물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천명관의 고래”라고 말했다. 밤을 새우며 읽은, 내 인생의 책이었다.
그녀는 그 말을 기억했고, 고래를 읽은 후, 이번 여행에 읽을 천명관의 또 다른 책을 가져온 것이었다.
그녀는 마지막 장을 펼치고, 내게 손짓했다.
“이 부분, 한번 읽어봐요.”
책 속엔 태국 남부를 여행했던 작가의 기록이 있었다.
삶의 방향을 잃고 방황하던 시절, 이곳에서 한 아이에게 들었던 말.
“도대체 당신이 원하는 게 뭐요?”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 이 책을 쓰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천명관 작가는 이 여행 전부를 우리와 함께 하고 있었다.
책을 덮자, 그녀의 눈빛이 나를 향했다.
말은 없었지만, 그 눈빛이 내게 물었다.
"도대체 당신이 원하는 게 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