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 2.0] 3. 라일레이, 그 바다와 시간 사이

라일레이에서

by 남해바다

3-1 여전히, 라일레이


호텔의 작은 놀이시설에 신나게 논 후, 우리는 자연스레 해변 쪽으로 향했다. 그러다 거리 한켠에서 우연히 발견한 [Travel time table]


푸켓, 라일레이, 피피섬, 란타섬...


이름만으로도 가슴이 흔들렸다.

지난 몇 년 동안 떠돌았던 곳.

혼자서, 그리고 둘이서, 모험심 하나로 어디든 떠돌았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작은 자유' 안에서 떠돌고 있었다.

아오낭 해변에 있는 매표소를 발견하고, 우리는 예전 둘만의 '쉼' 공간이었던 '라일레이'가 보고 싶어졌다.


여기에선 언제든 쉽게 닿을 수 있는 곳.

하지만 매표소에서 돌아온 대답은


“오늘은 파도가 높아 운항이 없습니다.”


아쉽게 발길을 돌리려던 순간, 어디선가 외국인 부부가 다가왔다.


“8명이 모이면 배를 띄울 수 있대요.”


공식 매표소와는 다른, 비공식 루트.

막혀 있던 길이, 태국 특유의 유연함 속에서 슬그머니 열리기 시작했다.


아들때문에 살짝 망설였지만, 우리는 위험을 무릅쓰고 그 부부가 모은 세 명의 일행과 함께 트럭에 올라 배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그중 한 명은 한국인 배낭여행자였다. 그녀는 내일 치앙마이로 넘어간다며, 이번이 세 번째 방문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듣자, 우리도 문득 당초 계획했던 치앙마이로 조금 일찍 넘어갈까, 잠시 마음이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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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테일 보트는 빠르게 달렸고, 그만큼 많이 흔들렸다.

아들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괜찮겠어?”

“괜찮아.”


살짝 겁먹은 얼굴, 하지만 단단한 눈빛.

파도가 튀었고, 아들은 결국 선글라스를 벗고 수경으로 바꿔 꼈다. 그 작은 행동은 이 상황이 모험임을 알려주는 하나의 의식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라일레이 도착.

아들은 혼자 배에서 내리겠다며 엄마의 손을 뿌리쳤다. 사다리를 타고 성큼 내려선 그 순간, 아이는 이 여행에서 또 한 뼘 성장했다.

라일레이 해변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모래 위를 신나게 달리던 아이는 곧장 물가로 향했다. 파도가 잠시 숨을 고르듯 잔잔해진 틈을 타 우리는 카약을 빌렸다.


“영차, 영차.”


아들과 나는 나란히 노를 저으며, 파도 사이를 가르기 시작했다. 장난처럼 시작된 아들의 노 젓기는 점점 진지해졌고, 언제부턴가 경쟁이라도 하듯 힘껏 팔을 놀렸다. 그러다 팔이 아파졌는지 아들은 노젓기를 멈추고 나에게 외쳤다.


“아빠, 빨리 좀 저어.”


말은 다그치는 듯했지만, 그 안엔 믿음과 의지가 담겨 있었다.

뒤쪽에 앉은 아내는 점점 멀어지는 해변을 바라보며 불안해했지만, 누가 노를 젓든, 결국 우린 함께 나아가고 있었다.

카약을 반납한 뒤,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손에 쥔 채 소금기 머문 피부를 씻어낼 곳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라일레이 프린세스 리조트] 앞에 멈춰 섰다.


예전, 우리가 머물던 그곳.

햇살과 그림자, 나무와 바람, 모든 것이 그대로인데, 시간만이 조용히 흐른 듯했다.

추억과 지금이 겹쳐지며. 우리는 서로를 바라봤고, 그리고 아들을 바라봤다.

아들은 프린세스 리조트 수영장에 뛰어 들었고, 우리는 '남의 집'을 내집처럼 누렸다. 이곳은 이제 둘만의 '쉼터'가 아니라, 셋이 함께 웃는 공간이 되었다.

갑작스레 비가 쏟아졌고 바다는 거칠어졌다. 날씨가 변덕스러워 더 늦기 전에 우리는 라일레이를 급하게 빠져 나와야 했다. 파도가 배를 때릴 때마다 아이는 엄마 품에 안겼다. 출발 전의 용감했던 모습은 잠시 접어둔 채, 아들은 엄마 품 속에서 안정을 찾았다.


하지만 아오낭에 도착할 즈음, 하늘이 개기 시작했고, 아들의 표정도 다시 밝아졌다.

아이의 감정은 그렇게 하늘을 닮아 있었다.


“아빠 여기서 몇 밤 자고 가?”

“6일 정도 더 자고 갈 거야.”

“아냐, 그냥 100밤 자고 가자!”

'더 머물고 싶다'는 아들의 진심 어린 표현에 웃음이 났다.


그리고 내가 아내에게 물었다.

“라일레이, 아쉽지 않아?”

치앙마이로 가자고 말하던 내가, 라일레이를 떠나기 아쉬워하며 아내를 붙잡고 있었다.

져녁이 되자, 우리는 해변 노을을 바라보며 산책을 하고, 맥도날드에서 간단하게 햄버거를 먹었다. 그리고 야시장에 들러 아들에게 200밧짜리 작은 장난감을 하나 사주었다.그 장난감은 이후 여행 내내 아들의 손에 들려 있었고, 지금도 집 어딘가에서 굴러다니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여행이란 건, 그렇게 사소한 기억들을 하나씩 수집하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오늘 스쳐 지나간 라일레이.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여전히 아쉬웠다.





3-2. 다시, 라일레이


다음 날 아침, 아들은 눈을 비비며 어제 산 장난감을 먼저 찾았다. 늘 그렇듯, 하루의 시작은 아주 소소한 일상에서부터 온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오늘을 정하지 않았다.


거친 파도를 두고 망설이는 사람들,

그들의 표정에는, 우리처럼 흔들리는 망설임이 담겨 있었다.

우리는 집을 나설 때도, 어제 한국 배낭여행객을 만났을 때도 치앙마이를생각했었다. 그리고 지금, 치앙마이행 비행편을 검색했다. 가려면 바로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떠나야 했지만, 우리는 잠시 망설였다.


라일레이가 남겨 놓은 감정.

결국 마음이 결정했다.


‘하루 더, 아니... 감정이 머무는 만큼 더.’

오늘의 바다는 어제보다 온순했다. 우리는 공식 루트로 운행하는 보트를 탔다. 어제 파도 위에서 흔들리던 기억이 생생한 아들은, 배에 오르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어제 탄 건 연습이었고, 오늘이 실전이야. 이제 잘 탈 수 있지?”


“……무서워.”


그 말을 끝으로 아들은 엄마의 품에 몸을 기댔다.

아이의 두려움은 여전했지만, 우리에게는 다시 라일레이로 가는 이유가 있었고, 그 이유는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었다.

이번에 내린 곳은 라일레이의 뒷쪽 선착장.

어제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흔들리는 배에서 곧장 뛰어내리던 어제와 달리, 오늘은 단단한 선착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짐을 옮기는 일조차 한결 여유로웠다.

아침 라일레이 행을 결정하고 예약한 숙소는 [샌드 시 리조트] (Sand Sea Resort), 해변과 수영장이 맞닿아 있는 프라이빗한 디럭스 방갈로였다. 짐은 풀지도 않은 채, 우리 셋은 곧장 바다로 나섰다.

그리고 그 순간, 어제 잠시 스쳐간 라일레이와는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졌다. 하늘은 눈부시게 맑았고, 바다는 차분히 물결쳤다. 라일레이는 불쑥 품을 열고 우리를 맞아주는 듯했다.


어쩌면 날씨 때문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만은 아니었다.


스쳐보는 풍경과, 머물며 바라보는 풍경 사이엔 깊이의 차이가 있었다.

잠깐 지나쳤을 때는 미처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오늘은 또렷하게 마음에 닿았다.


마치 뜨겁게 피어올랐다가 사라지는 인연과, 오래 곁에 머물며 따뜻함을 주는 가족 사이의 차이처럼. 라일레이는 조용히 우리를 품었다.

아들도 달라져 있었다.

어제는 뛰어다니던 그 아이가, 오늘은 파도에 발을 담근 채 조용히 거닐고 있었다. 모래 위에 글자를 새기며 무언가를 설명했지만, 그 뜻은 알 수 없었다.


'괜찮다. 여기서는 그래도 괜찮다.

이 바다는 아무렇게나 낙서해도 되는 커다란 벽지 같은 곳이니까.'

우리는 예전에 둘이서 갔던 식당을 들렀다. 그땐 통후추 오징어 볶음을 시켰고, 지금도 메뉴에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엄마와 아빠가 피어오르는 감정을 느끼고 있을 때, 아들이 끼어들었다.


“나도 시킬래! 나는... 짜파게티!”

"지금은 구경만 하는 거야."

언젠가 아들은 태어나기 전 아내와 나의 이야기를 이 글들을 통해서 알게 될 것이고, 오늘 같은 자신의 모습에 미소를 짓게 될 것이다.


오늘은,

이번 여정에서 가장 조용하고 평화로운 하루였다.

바다는 여전히 제 갈 길을 가고 있었고, 우리는 그 곁을 천천히 걸었다.


어제 스쳤던 라일레이는 사진 속 한 컷이었고,

오늘 머물렀던 라일레이는 마음속 장면이되었다.


여행지에 ‘머문다’는 건,

그곳에 나의 속도를 맞추는 일.


라일레이로 다시 돌아오건,

정말 잘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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