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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minic Aug 05. 2024

난무하는 죽음에 대한 무감




이전에 전쟁은 ‘훌륭한 쇼케이스’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전쟁이 쇼케이스라는 내 생각은 아직 변함이 없다. 그러나 나는 한 가지 변화를 감지했다. ’훌륭한’ 부분에 대해서다.

더 이상 무고한 시민의 죽음은 대중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과거에나 먹히던 공적인 장에서의 마케팅 의식이다. 이제는 의로운 사람 몇의 사망이 사회를 움직이기에 충분치 않다.

그렇다고 모든 노력이 헛되다는 유의 회의적인 말을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나는 반복되는 절망을 학습함으로써 무력감을 내재화하는 것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지금도 한국에서는 매일 여자들이 죽는다. 기사 제목은 천편일률적이다. 사람 한 명이 죽는 일을 그렇게 납작하게 표현하기도 힘들 것이다. 특히 소위 ‘교제 살인’*에 의한 범행의 비율은 괄목할만하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이제 누가 그것에 관심 있는가? 그 사건들의 중요성은 절대 덜하지 않지만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확연히 무감해진다.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나는 전쟁의 참사가 날이 갈수록 절망적인 뉴스만을 생산한다. 하지만 이제 사람들이 관심 있는 분야는 파리 올림픽이다. 티모시 샬라메의 열애 상대이고, 바이든과 트럼프의 밈 사진이다.

*이러한 형태의 사건을 ‘교제 살인’이라고 칭하기에 부적절하여 작은따옴표를 붙인다.


사람들은 지쳤다. 누구든 매일 잔인한 뉴스만 보고 살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강철로 된 인간이라도 외부의 부정적 이야기를 받아들이고 통탄할 수 있는 한계가 있다. 정치적 시선, 관조적인 작가의 손, 계산기를 두드리는 자본의 은밀한 외압을 거쳐 우리에게 도달하는 인간 하나하나의 죽음은 정제된 일반성을 띠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생각한다. 여느 때와 다름없군.


여전히 희망이 있다고, 세계는 변할 것이고, 어떤 길고 굽이진 길을 돌아 결국에는 우리가 동의할 수 있는 ‘정의‘의 영역에 도달하게 될 거라고 기약 없이 믿는 것은 이제 환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멀리 떨어진 개개인의 한 마디는 미약하다. 역동이 없으면 미래는 과거의 폭력을 재생산하며 제자리걸음만을 반복할 것이다. 보고 배운 게 그것뿐이라 형태만을 바꾼 그러나 그 본질은 변하지 않는 역사만이 미래를 손안에 가지고 있다. 희망은 미래에 원천을 두고 있어야 한다. 결국 과거에서 미래를 구출시킬 동력이 없는 이상 희망은 영원히 갇힌 루프 안의 것이다. 문제는 역동의 엔진을 찾을 방도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모두 길을 잃었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우리 모두 아무것도 하지 말자는 얘기를 하려고 브런치에 들어왔다고 하고 싶지는 않다. 하던 대로 계속해야 한다. 그러나 잊지만은 말자는 얘기다. 말하자면 마라톤 경주의 음수대를 차려 주고 싶은 마음이다. 그게 시원하고 단 물은 아니고 이런 회의적인 어조의 뭉텅이라고는 해도. 누군가 비슷한 심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큰 위안이 될 때가 있다는 것을 안다. 이 글을 통해 한마디라도 해보는 것이다. 서로 지친 걸 안다고. 하지만 계속 두고 보자고. 언젠가 함께 엔진의 시동을 당기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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