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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록소록 Jan 06. 2024

알잘딱깔센의 길

세상 앞에 사회인으로서 진출하며 문득 두렵다고 느낀 것은 이제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여기서 구체적으로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것에는 무엇이 있을까.


누군가 굳이 짚지 않으면 모르는 고질적인 습관이나 행동, 처세 등 다양한 것들을 아우를 것이다. 그중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하는 별로인 습관, 태도에 대해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성인이 되어가며, 나이를 먹어가며 자연스럽게 누군가의 개입이 줄어든다. 직접적인 개입이 줄어드는 만큼 옆에서 구체적으로 길잡이를 해줄 사람은 이제 거의 없다. 심지어 코칭해 줄 이를 직접 찾고, 비용을 지불해야만 하기도 한다. 따끔히 가르쳐주거나 직면할 수 있도록 이끌어줄 사람도 생각보다 만나기 어렵다.


미숙했지만 성인으로서 첫 발을 내딛던 대학시절을 떠올려본다. 사회가 본편이라면, 대학시절은 티저였다. 당시에는 잘 몰랐어도, 분명 그 '예고편' 스러운 느낌을 어렴풋이 받았다. 뒤에서 수군거리면 수군거렸지 면전에서는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 것만 같은 그 어렴풋한 느낌. 학점이나 진로에 도움이 될만한 것들은 알아서 스스로 찾아야 했으며, 하다못해 대외적인 이미지라도 잘 구축하고 인적 자원을 활용해 정보들을 수집해야 했다. 그리고 그러지 못하면 도태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사회생활에서, 그 농도는 짙어진다. 나이에 얹어진 무게만큼, 사회생활에서의 역할만큼, 더욱더 짙어짐을 느낀다.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 사이에서 별로인 태도나 미숙한 부분에 대해 당사자에게 직접 말해주는 일은 점점 더 줄어든다. 근 몇 년 사이 불현듯 느끼고는 섬찟했던 것은, 이제 누구도 상대방의 습관이나 행동에 대해 굳이 간섭하거나 직언을 하여 불편한 상황을 만들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그게 내가 되기는 더더욱 싫기에 굳이 수면 위로 올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것을 넘어 모두가 말없이 조용히 피하는 상황이 생겨버린다.


결국 스스로 알아채고, 알아서 조심하고, 알아서 스스로를 다듬어나가는 방법밖에는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자아성찰은 이래서 중요하구나.


알아서 하면 얼마나 좋겠는가마는…

스스로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 그 단일한 관점에서 벗어나기란 어렵다. 객관적 시선을 획득하고 유지하는 일이란 보통 갈고닦아야 하는 수행의 과정이 아니다.


부지런히 스스로를 관찰하고, 섬세하게 반추하고, 진득하게 사유해야 겨우 자라나는 능력인 것을.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의 현대인들은 얼마나 더 부지런을 떨어야 하는 것일까. 업무 및 직장생활, 개인적 일상, 자기 계발을 넘어 수양까지 부지런히 해내야 하다니.


반면교사가 될 만한 사람을 곁에서 목도하였을 때, 퍼뜩 정신이 들곤 한다. 이러한 생각이 뼛속까지 침투하는 듯 저릿할 때는 조금은 강박적으로 되돌아보고 검열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윽고, 스스로를 피곤해하며 대체 왜 이러지 하는 수순으로 이어진다. 건강하게 되돌아보고 알아서 잘하는 게 이렇게나 어렵다.


때로는 이것이 사회에서 도태되지 않음을 넘어 인정받고자 하는 강박과 검열이 되더라도, 스스로를 다룰 수 있는 힘을 기르는 일에 대한 중요성은 부정할 수 없다. 자신의 신체와 감정, 생체리듬, 사회적 관계 내에서의 태도를 다듬고, 조절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말이다. 세밀한 기계를 다루듯 미세한 조정과 같은 일이다.


늘 그랬듯, 시행착오도 당연히 따라붙을 것이다.

애초에 스스로를 매 순간 완벽하게 다룬다면 너무 인간미 없지 않은가. 긍정적 영향을 주고받는 나를 만드는 자아성찰과 반추가 될 수 있도록 가끔은 흔들려도 근본적 관점이 상실되지는 않아야겠다.


휴, 알잘딱깔센의 길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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