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스리랑카 여행 느낀 점 3 (마지막 편)

by 책 커피 그리고 삶
여행을 다녀온 지 벌써 2주가 지났지만 아직도 여운이 남아 있다. 그동안 많은 나라를 여행다녔음에도 이번처럼 여운이 잔잔하게 깔린 나라는 많지 않다. 그곳에는 우리가 잃어버렸던 것들, 미소, 사람들 간의 정, 추억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그것들은 나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든다.


70, 80년대, 지금보다 많은 것이 부족했던 시절이지만 이웃 간의 정과 웃음, 공감과 사회적 결속력 등 사회적 분위기가 지금과 다른 느낌이다. 지금 우리는 생활환경이 개선되고 GDP가 높아짐에도 왜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일까?


그때는 학교가 끝나면, 동네 형들, 친구들과 산으로, 물가로 물고기를 잡으러 다녔고 동네방네 쏘다니면서 총싸움, 술래잡기 등을 하면서, 혹여나 싸움이라도 나면 형이나 친구들이 서로 중재해 주었다. 장난감이 없으면 직접 만들었고 납작하고 맨들맨들한 돌멩이를 주워와 비석 치기를 하며 놀았다. 친구들과 하루 종일 웃느라 저녁 식사를 까먹기 일쑤였다.


이웃 간에도 음식을 나눠 먹었고 정(情)이 있었으며, 서로의 사정을 잘 알았다. 동네에 일이 있으면 모두 모여 함께 일하고 동네 형, 어르신들이 자연스럽게 아이들의 인성 교육을 하였으며, 친구 엄마가 밥이나 간식 등을 챙겨주면 우리들은 감사한 마음을 가졌다.



낡은 것들이 불러일으키는 향수


스리랑카 여행을 하면서 본 문화재급 건물들은 당시의 건축양식들이 잘 보여주고 있었다. 반면, 일반 상점들과 서민들이 거주하는 건물들은 석고나 인조석 등으로 외벽이 미장되어 있는 것이 아닌 대충 시멘트로 발라놓은 벽면에 군데군데 시커먼 얼룩과 이끼가 끼어 있었다. 몇몇은 색이 바랜 그래피티로 지저분해 보였다. 어릴 적 보던 군부대나 학교 담벼락이나 같은 느낌이었다. 콜롬보 같은 대도시의 경우, 곳곳에 수십 층높이의 빌딩이 보였으나 서울 청계천에서 바라보는 뷰처럼 깔끔하지도 않았다.


버스의 의자는 가죽이 너덜하고 색깔이 변질되었으며, 손잡이의 아크릴 피복은 군데군데 벗겨져 녹이 슨 쇠가 드러나 있다. 기차 역시 깨끗하고 깔끔한 객차가 아닌 버스와 비슷한 상태이다. 기차 객차 천정에는 먼지가 시커멓게 끼어 있는 선풍기가 돌고 창문은 잘 열리지 않아 힘을 주어야 간신히 조금씩 움직인다. 그 사이로 매캐한 매연이 들어와 콧속을 시커멓게 만든다. 또한, 기차의 좌석은 우리나라처럼 앞뒤로 젖혀지는 의자가 아닌 군대 느낌의 정확한 90도 각도를 가진 고정된 의자로 이동하는 내내 불편하기 그지없다. 이 나라는 우리나라에서 벌써 폐차나 폐기된 낡은 것들을 그렇게 활용하고 있었다.


내가 머물렀던 저렴한 숙소의 계단은 인조석으로 미장된 깔끔한 계단이 아닌 시멘트로 대충 발라놓았고 방안은 70년대 느낌의 촌스러운 짙은 갈색의 가구가 배치되어 있으며, 바닥에는 개미와 거미가 기어 다닌다. 카드키는 고사하고 옛날 둥근 모양의 똑딱이가 달린 문고리로 어설픈 열쇠를 사용하여 문을 걸어 잠갔다. 이것마저도 문고리가 망가져 1시간 동안 호텔 주인이 고치는 경우도 있었다. 온수는 수도꼭지를 좌우로 돌리는 방식이 아닌 샤워기 옆에 온수 스위치를 올려 찔끔찔끔 나오는 방식이었고 이마저도 찬물과 온수 꼭지를 번갈아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낡음'은 그 자체가 옛것의 추억을 끌어올리는 마중물의 역할을 한다. 초등학생 때, 집에 빨리 가려고 학교 담을 넘었던 기억, 학교 담벼락에 적힌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문구, 그 당시 '멸공', '때려잡자...' 등 약간은 무서운 말들이 적힌 군부대 담벼락이 생각난다.


관광객의 입장에서 자신의 나라에서 이미 없어진 것들, 부모에게 들었던 옛것들을 직접 경험하면서 그것 자체가 관광 상품이 된다. 관광객들은 낡음의 불편에 오히려 즐거워한다. 아마 부모 세대의 낭만을 경험하고 싶어서 일 것이다. 부모 세대 또한 낡은 것을 통해 그동안 삶에서 잊었던 자신의 추억과 낭만을 이끌어낸다.



아름다운 미소와 친절함


나에게 스리랑카의 가장 큰 매력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바로 '미소와 친절함'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나치면서 나에게 인사와 함께 미소를 건넨다.


나누오야(Nanu Oya)는 스리랑카에서 유명한 누에라엘리야에서 차로 20분 거리에 떨어져 있는, 마을 주민도 몇 명 없는 작은 산골 마을이다. 새벽에 눈을 떠 차밭을 둘러싼 흙냄새가 물씬 풍겨오는 산길을 오르며, 오랜만에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멋진 풍경을 감상하였다. 저기 멀리 두 명의 학생이 일찍 등교하면서 나와 마주쳤고 어느 정도 거리에 가까워지자 쑥스러운 미소로

'헬로우~'

인사를 건넨다. 밝게 인사하는 학생의 얼굴에서 미소가 가득하다.


미소는 친절함과 함께 온다. 나누오야에는 있는 작은 폭포로 향해 걸어갈 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다시 돌아갈까 고민하던 찰나, 갑자기 낡은 트럭이 멈추어 서더니 어디 가냐?라고 묻는다. 그 트럭은 창문도 고정되지 않아 드라이버를 창문틀 고무 사이에 꽂아 받쳐놓은 아주 낡은 차였다. 아마 비가 내리는 날씨에 터덜터덜 오르막을 걷는 외국인이 힘들어 보였나 보다. 가는 길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고 금방 폭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즐거운 여행이 되라고 인사하는 아저씨의 미소위에 친절함이 더해져 스리랑카의 매력이 한층 올라갔다.


담불라에서 내가 내릴 정류장을 놓칠까봐 굳이 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내 팔을 잡아 이끌며, 여기라고 가르쳐 주는 주름이 깊게 파인 할아버지(결국 그 할아버지 자리를 누군가가 앉게 됨), 내가 감사하다는 인사에 할아버지는 손을 흔들며, 살짝 미소를 보낸다. 주름 속에는 살아오면서 쌓아온 아름다운 미소가 담겨 있는 것 같다. 좁아터지는 버스에서 배낭 때문에 내 옆자리가 불편함에도 연실 웃으면서 괜찮다고 하는 할머니, 숙소로 가는 길을 헤매자 자기를 따라오라고 안내해 준 아저씨 등 그들의 미소는 친절함이 따라왔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아이의 미소를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 유지하고 있다. 그것은 원래 인간들이 가진 본연의, 태초의 미소이고 순수함이다. 나중에 숙소에서 거울을 보며, 미소를 흉내내 본다. 그들의 미소와 비교하니, 마치 새하얀 도화지에 살면서 낀 여러 가지 얼룩과 누레진 나의 마음이 미소에 드러나는 것 같다. 뭔가 어색하고 이들의 미소를 표현해내지 못한다. 순수하고 예쁜 미소를 짓기 위해 같은 미소를 지으려고 해도 썩소의 느낌이다.


아마 그것은 삶면서 어린 시절 잃어버린 낭만과 순수함 때문일 것이다.



걸인들에게 적선하는 사람들


보통 동남아 쪽으로 여행을 가면, 사회복지가 우리나라만큼 잘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느낀다. 한눈에 보아도 도움이 필요한 모습 때문에 적선을 많이 하는 편이다. 콜롬보 거리에서 걷다 보면, 거리나 다리에서 구걸하는 걸인들, 노숙자들이 보인다. 그들은 나를 보면, 손을 내민다. 그들의 모습은 다리가 없거나, 얼굴이 한쪽이 뭉개져 있거나, 한눈에 봐도 장애를 가지고 있거나,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었다.


많은 곳을 여행했지만 사람들이 노숙자들에게 여기처럼 적선을 많이 하는 나라는 처음이다. 다른 나라에 비해 적선하는 빈도가 높다. 한편으로는 종교적 이유이라 유추해 본다. 대부분 불교를 믿고 있어 불교의 가르침에 따라 선행을 하여 좋은 업을 쌓는 것이 아닐까..?


여행을 오기 전에, 어느 순간부터 선행에 대해 의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동안 사회단체에서 내가 기부한 돈을 자신들 마음대로 사용하고 적절하게 사용하지 않은 그러한 뉴스 기사를 볼 때마다 단체에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나보다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않은 사람들이지만 지갑을 꺼내 노숙자들에게 돈을 건네는 모습을 볼 때마다 선행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여기는 순수하게 도움을 주려는 마음을 되살린다.



시간에 대한 관념과 여유


지역과 지역을 이동할 때, 기차를 이용하였는데, 정시에 출발한 적이 없다. 짧게는 15분, 길게는 1시간... 좌석에 앉아 멍하니 있다 보면, 어느 순간 출발한다. 또한, 역마다 연착은 왜 이리 긴지.. 성질 급한 사람은 환장할 것 같다.


사람들을 살펴보니 서로 대화하면서 불평하지 않고 당연히 받아들이는 모습이다. 몇몇은 사진을 찍고 몇몇은 간식을 먹으며, 몇몇은 나를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본다.


시간 단위, 초 단위로 나누어 사는 삶처럼 열심히 사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아쉽게도 놓치는 것들이 있을 수밖에 없다. 하늘에 떠 있는 다양한 모양의 구름, 열심히 먹이를 찾아다니는 개미, 새벽에 멋지게 짜놓은 거미줄 등 의도하지 않으면 분명 존재히지만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


이런 것들은 브레이크가 고장 난 삶에 ‘멈춤’이라는 선물을 준다. 어느 순간부터 이런 것들이 보이지 않게 되면서 잠시 멈춰야 할 때라는 것을 알려주는 듯하다.



밤이 있는 삶


스리랑카 여행 중 가장 불만인 점은 밤에 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방콕의 카오산로드, 호찌민의 워킹스트리트 같은 화려한 불빛과 쿵쾅거리는 사운드가 있는 장소가 없었다. 구글맵에 검색하니 나이트클럽이 있지만 내가 거기 갈 나이도 아니고 Pup이나 Bar가 있지만 분위기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도 저녁을 먹고 나면 슬금슬금 숙소로 돌아와 대략 8~9시 즈음 잠자리에 들었다.


늦은 저녁이 되면 벌써부터 문을 닫기 시작한다. 대략 저녁 7시부터 정리하고 8시 정도 되면 거의 문을 닫는다. 돌아다니는 사람도 별로 없다. 동네 로컬 음식점 겸 술집들로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지만 그렇게 많지 않다. 우리나라처럼 24시간 문을 연 곳은 찾을 수 없었고 다들 일찍 귀가한다. 그리고 가족들과 TV를 보거나 마당에 나와 가족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인가 밤에 수면을 방해하는 것들이 많이 생겼다. TV, 유튜브 등 아무 생각 없이 보고 있으면 1~2시간을 훌쩍 넘어간다. 식당과 술집의 네온사인은 잠을 자야 할 시간에 뱃속을 채우고 싶은 욕구와 깨어있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어떤 이들은 돈을 벌기 위해 야간에 투잡을 뛰고 미래를 위해 늦게까지 공부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짜여진 일상을 살아가며, 늦게까지 자신을 가만두지 않는다(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지만...).


바쁜 삶이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낮과 밤을 구분되지 않고 밤이란 존재와 역할을 잊고 사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밤은 하루를 마무리하고 정리하는 시간이다. 가족이 함께 모일 수 있는 시간이다. 그리고 밤하늘의 별을 보며, 낭만적인 생각을 할 시간이다.



열심히 살고 있다. 그런데 내가 놓친 것은 무엇일까


여행의 좋은 점은 가끔 나의 삶에 브레이크 역할을 한다. 한 방향으로 가속도가 붙은 삶은 뒤를 돌아보기 어렵다. 여행은 삶의 방향을 바꾸거나 멈추게 만들어 주변을 보게 만든다.


여행하는 동안 느낀 것이 많았지만 집으로 돌아와도 예전의 삶의 모습과 그다지 달라진 것은 없다. 여전히 규칙적인 일상에서 짜여진 일과를 소화하며, 여행 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살고 있다. 단기간의 여행이 나의 삶을 바꾸기는 어렵다. 하지만 열심히 나아가는 방향에 잠깐의 멈춤을 주고 주위를 둘러보게 만든다.


'맴맴~' 벤치에 앉아 있으니 자신들의 최후의 외침을 하는 메미들의 소리가 들린다. 사실 매미 소리는 예전에도 들렸지만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처절한 매미의 외침과 그와 별개로 음의 높낮이에 따라 음악을 상상하는 것은 최근 스리랑카를 다녀온 다음부터다.


내가 목표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삶도 방향성이 있어 일정한 루틴이 반복이 되거나 목표만 바라보게 되면, 점점 내가 나아가는 삶의 길 양옆에 벽이 생기고 시간이 지날수록 벽이 높아져 더 이상 옆을 볼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예전에는 음악도 듣고, 주변사람들에게 관심도 갖고, 하늘의 무지개도 볼 수 있었지만 음악을 멀리하고 주변사람들이 귀찮아지며, 무지개에 무감각해진다. 점점 앞만 보게 되면서 스스로 더욱 좁을 길을 만들어 답답하게 만든다.


이것이 나쁜 것이 아니다. 효과적으로 목표에 도달하고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 가족 간의 대화, 마음의 여유, 그리고 미소를 잃게 된다. 등가교환(等價交換) 같은 것이고 결코 풍요로운 삶은 아닐 것이다.


주말에 벤치에 앉아 매미의 소리를 듣는다. 매미가 무엇이라 말하는지, 어떤 노래를 부르고 있는지 상상해 본다.


나보고 '잘 살고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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