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 여행 느낀 점 2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 버스를 타면 파란색 유니폼에 베레모를 쓴 안내양이 있었다. 안내양은 직접 버스 문을 열고 닫고, 사람들에게 버스 요금을 받으며, 승객들이 다 올라타면 버스의 옆면을 두들이면서 "오라이"라고 외쳤다.
어릴 때, 그 '오라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궁금하면서도 재미있어 무의식적으로 따라 하곤 했다. 나중에 영어 'All right'의 일본 발음에서 유래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All right' 대신 '출발~!'이라는 한국말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지금이야 이렇게 생각하지만 당시 일본어의 잔재가 많이 남아 있던 시대적 상황을 생각하면 ‘오라이’가 사람들의 암묵적 약속이 아니었을까.
무엇보다 사람들로 가득 찬 버스에, 문도 잘 닫히지 않는 비좁은 공간에, 최후의 보루처럼 안내양이 문에 끼어 버티면서 가는 버스를 보면서 참 대단하게 보였다.
그런데... 그 모습을 여기서 볼 줄이야....
버스 안내양? 버스 안내맨?
스리랑카 로컬 버스를 타면, 낯선 남자가 다가온다. "웨어르 뚜고?" 인도 영화에서 들었던 독특한 영어 발음 같으면서도 약간 다른 느낌이다(스리랑카의 독특한 발음을 적응하는데 대략 3일 걸렸다).
"담불라~!"
"다블라~? 빠이브 헌뜨리드“
버스맨을 지켜보고 있자니 타는 사람들에게 버스 요금을 징수한다. 버스가 멈추고 앞쪽이나 뒤쪽으로 사람들이 다 내리면 큰소리로 앞의 운전사에게 출발하라고 전달한다. 이 남자가 하는 일이 마치 우리 70, 80년대 버스 안내양과 비슷하다.
우리나라처럼 교통카드가 아니더라도 요금통을 설치하면 좀 더 효율적일텐데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버스 안 구조가 우리나라 버스와 달리 좌석이 2, 3구조이고 출입구가 양끝에 있다. 그래서 버스에서 내리기 위해 양끝 출입구 쪽으로 이동할 때, 통로가 좁아 사람이 서있으면 움직이기가 참 어렵고 사람들과의 신체적 접속도 피할 수 없다. 그런 상황에서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많아지면 버스 출입구 뒤로 탔을 때, 요금 내러 가기도 어렵고 운전하기 바쁜 기사가 일일이 챙기기 어렵다.
그래서 여기는 버스 안내양이 아닌 버스 안내맨이 필요하다.
절대 중심의 균형감각
'캔디(Kandy)에서 '마타라(Matara)'라는 지역으로 이동할 때, 좌석이 없어 입석을 타고 갔다. 옛날 강원도의 도로처럼 곧은길이 아니라 좌우로 왔다 갔다하는 고갯길이라 버스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더군다나 비가 새는 폐차 수준의 버스(내가 초등학교때 보던 버스)라 오래된 디젤엔진의 끊임없는 진동에 시달려야 했다.
이처럼 흔들리는 버스를 탈 때마다 어릴 때, 보던 무협 만화의 한 장면을 떠올린다. 물살이 센 강물에서 떠내려가지 않기 위해 몸무게를 바위처럼 천근(600kg)으로 늘려서 움직이지 않도록 하는 무공, '천근추(千斤墜)'를 사용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래서 나도 다리에 힘을 주고 마음속으로 '천근추'라고 외치며, 버스 바닥을 천근의 무게로 짓누른다. 버스 안에서 어떤 흔들림도 없이 바위처럼 움직이지 않는 것을 바랬다.
그러나 무협지의 허황된 상상일 뿐 현실은 중심을 잡기 위해 팔에 힘을 꽉 주고 최대한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급정거라도 하는 경우, 몸이 한쪽으로 확 쏠려 다른 사람과 부딪친다. 천근추는 커녕 팔다리의 식은땀과 아임쏘리만 연발한다.
반면, 안내맨은 의자 한쪽 모서리에 엉덩이와 허리 사이를 대고 버스의 흔들림에 맞추어 몸을 자유롭게 이리저리 움직인다. 그러면서 급정거에 대비해 적정한 각도로 벌리고 발의 방향을 45도 각도로 하여 고정한다. 안내맨은 마치 버스의 흔들림을 리듬처럼 느끼고 몸은 그냥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것 같았다. 놀라운 점은 한 손에는 카드 포스기를 들고 한손에는 현금을 쥐고 돌아다니면서 버스 요금을 거슬러 준다.
나에 비하면 무협지에 나오는 십갑자 내공의 초고수와 같았다.
몇 시간의 입석이 우스운 강철 체력과 AI를 능가하는 안면인식 기억력
콜롬보에서 담불라까지 이동할 때, 많은 사람들이 버스에 올라타고 내리기를 반복했다. 담불라에 도착할 때까지 거의 4시간 동안 좌석이 비워지지 않았다. 설사 자리가 생긴다고 해도 손님을 위해 버스맨이 먼저 앉는 법이 없다.
저 시간동안 오래 서있으면 무릎 관절 나갈 거 같은데 아무렇지도 않아 한다. 가끔 손님이 너무 많이 탈 때는 문도 없는 출입구에 달린 봉하나에 의지해 매달려 간다. 지금은 잊고 있었던 어릴 적에 안내양이 보여주었던 포스의 재현이었다.
기억력도 기가 막혀 승객이 아무리 많이 타도 누가 돈을 안냈는지 확인하고 확실하게 요금을 받는다. 약간의 안면인식장애가 있는 나의 능력을 훨씬 능가한다. 내가 만약 스리랑카에 태어났다면, 절대 저 직업을 갖지 못할 것이다.
삶의 환경이 달인(達人)을 만들고, 그런 점에서 우리는 모두 달인이다
버스맨은 처음부터 저런 기억력과 균형감각, 그리고 체력을 가졌을까? 아니면, 이 직업에 종사하면서 습득된 스킬인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저 하루하루, 가족을 위해 그리고 자신의 꿈을 위해 자신의 일을 한 것뿐이다. 그것이 하루에도 몇 시간, 며칠, 몇 년 동안 일을 하다 보니, 몸이 자연스럽게 채득한 것이다.
달인은 어떤 분야에 뛰어난 역량을 가진 사람을 뜻한다. 분명 지금까지 언급한 저 능력은 나를 비롯하여 버스맨이 아닌 사람들보다는 훨씬 뛰어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버스맨은 보통 사람들을 뛰어넘는 달인이다.
삶의 환경은 달인을 만든다. 어떡하든 적응하기 위해, 필요한 근육이 만들어지고 균형 감각이 향상된다. 본래 인간이 가진 능력을 최대한 끌어올려 자신이 하는 일을 수행할 수 있도록 만든다.
육체적인 것뿐만 아니라 일을 처리하는 프로세서를 자연스럽게 떠올린다거나 직업에서 피할 수 없는 어떠한 상황에서 대처하는 능력 등 정신적 측면에서도 향상은 이루어지며, 시간이 지날수록 해당 분야의 일을 더 잘 수행한다.
'나는 어느 분야에서 달인일까?' 최고는 아니지만 어설픈 달인처럼 남들보다 잘하는 분야들이 있다. 나의 능력 또한 많은 경험과 노하우가 쌓여 만들어진 능력이다. 그런 점에서 각자의 분야에서 시간과 노력이 투자된다면 어느 순간부터 자신도 모르게 달인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삶에서 달인이거나 달인이 될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