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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영 글쓰기 Jan 04. 2018

조직과 개인, 그리고 미래

개인은 조직을 위해, 조직은 개인을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우리나라 조직은 거의 모두가 군대식을 표방하고 있다. 조직의 고위 간부급이 그때 그 시절을 겪은 이들인 데다 부하직원이 승진을 하더라도 마치 뼛 속 깊은 DNA처럼 승계는 반복된다. 너무 오랫동안 터부시되어 온 터라, 개인의 끈기와 역량만을 조직에 충성하도록 주입시키곤 한다.


이런 분위기 속에 합리적 개인주의자의 면모는 악으로 규정해버리는 것이 조직의 흔한 논리가 된다. 개인이 적당한 타협을 꾀할 때에는 먼저 자신을 사랑하고 함께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인데, 이러한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타협을 빌미로 조직원을 ‘부려먹는’ 행태가 너무 잦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 간단하게 말해서 개인은 조직을 위해, 조직은 개인을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는 태생적인 문제를 꼽고 싶다. 아울러 대안도 살펴보기로 한다.



우리는 ‘열심히만 하지 말고 잘 하는 게 중요하다'는 말을 조직의 상급자로부터 들으며 생활한다. ‘열심히’가 과정이라면 ‘잘’은 결과이다. 과정이 쌓여서 결과가 나오지만 조직은 한가하게 기다려주지 않는다. ‘함께’가 중요하지만 무능한 리더의 조직은 토론도 협력도 여유도 없다. 채찍질을 하며 한계를 돌파하라고 강요하듯 강조한다. 옆 동료를 위해서, 조직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서, 꿈을 꾸는 것이나 아픈 건 개인의 사정일 뿐이다. 오직 성과를 위해 (관리) 운영자•사용자의 논리를 노동자에게 주입할 뿐이다.

훈련과정이 동일하게 주어졌을 때 다소 뒤처지는 개인에게는 낙인을 찍는다. 심하면 관심을 명분 삼아 배척(따돌림)하거나 감시한다. 문제는 그런 조직 속에 내가 속한 것이 스스로 한심해 보일 때 자신감은 물론 자존감까지 급속도로 하락할 수 있다는 점이다. 정신 건강에도 매우 해롭다. 줄을 끊어내지 못하는 이유가 자기관리 소홀이라는 (핍박에 가까운) 질책이거나 혹은 돈문제라면 자존감은 바닥까지 내동댕이쳐지고 말 것이다.


모르는 바 아니다. 이익집단인 조직체라면 성과주의를 포기할 수 없는 게 작금의 현실이다. 성과주의에 취한 조직에서 악순환되는 문제의 원인을 생각해본다. 조직원 간의 정서적 교감과 교류, 충분한 휴식, 조직원들이 내놓은 다양한 아이디어의 반영, 조직원 개개인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와 존중, 개인의 비전과 목표를 조직 안에서 수립할 수 있는 단계별 성장 발판 마련, 인력 확충의 전제로 할당한 양과 질의 역할분담, 관리자의 리더십 등이 부재하기 때문은 아닐는지.

대안이라면, 기본적 속성이 자유로운 자연인이어야 하는 인간은 최소한 인간답게, 조직을 위해야만 하는 기계적인 일은 진짜 기계(이하 기기)가 하게 되는 세상으로 정착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나는 4차 산업혁명에서 인간을 대체하는 기기의 도입 속도가 늦는 이유를 두 가지로 본다.

첫째는 기기의 개발•투입 가격보다 상대적으로 인건비가 인간이 더 저렴하기 때문이다. 사용자 입장에서는 효율을 택할 수밖에 없다. 둘째는 기기를 개발하고 거기에 투자하는 전문가 및 큰 손들이 아직은 돈이 많이 남지 않으니 별 관심을 두고 있지 않는 거다. 관심의 집중도가 기기가 투입될 분야에 있지 않을 뿐 기기의 발전 속도는 이미 몇몇 분야의 조직에 투입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콜센터가 대표적이다. 인간이 인간에게 문의를 하는 건 머신러닝을 한 기기라면 얼마든지 대응할 수 있다. 그럼 인간은 질문도 기기처럼 정확하고 명료하게 해야만 답변을 똑같이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규정 외 요구사항이 생기면 지금은 인간에게 우기거나 욕하거나 짜증을 내면 됐지만 기기는 그 무엇도 ‘개무시’하게 될 것이니 인간들이 콜센터에 고객으로 문의하는 순응 체계 자체가 달라지게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조직이 합리적으로 소속원을 배려하고 존중한다면 인간이  기계화된 일상에 스트레스 받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러나 그 합리성은 언제나 돈 앞에서 굴욕을 맛본다. 그리하여 4차 산업혁명은 우리에게 밝은 미래를 꿈꾸게 한다. 그런데 과연, 내가 노동자로서의 가치가 있는 나이까지 많은 분야에 적정한 기기(혹은 시스템)의 투입이 되어 인간의 노동력을 ‘대체’하게 될 지는 미지수이다. 대체를 한다면 인간은 보다 인생을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누릴 수 있어야 할 텐데 말이다.(이동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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