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동영 글쓰기 Dec 24. 2017

연말연시 직장퇴사론

당신의 결정을 응원합니다. 열심히 일하지 않았어도.

취업 포털에서 설문조사한 통계치 하나가 떠오른다. '직장을 퇴사하는 시기'를 조사한 건데, 퇴사자가 가장 많은 달이 바로 12월이었다. 그다음이 '시작' '새 학기' 등의 키워드가 있는 3월-2월-1월 순이었으니 연말연시에는 퇴사하고 싶은 욕구가 꿈틀대는 시기가 확실해보인다.

만약 당신이 지금,
퇴사를 꿈꾸고 있다면
새로운 시작을 생각한다면,
누가 뭐래도 난 당신의 결정을 응원한다.


계속 버티든 떠나든, 모든 건 본인의 몫이니 과감히 결단하는 용기와 선택에 달렸다. 아마 직장만 떠나는 게 아니라, 연인들이 떠나는 비율도 연말연시가 가장 많지 않을까 하고 추측해본다. 연말연시는 '떠나고 싶은', 정확하게는 '관계를 정리하고 싶은'시기이니까. 위 설문조사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간 JTBC 보도도 있었다.


JTBC 뉴스룸

퇴사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1년 차 이하 신입사원이 1년 내 퇴사하는 비율이 가장 많다는 건 사회적 이슈이다. 그 이유까지 들여다보면 '조직과 업무 적응 문제' 혹은 '직무가 적성에 맞지 않아서'라고 나온단다.

세상에, 적성에 맞는 일을 우리가 어떻게 선택하나? 알바에 자격증에 학점관리 근근이 하며 4년제 대학 나와도 겨우 취업하는데, 따질 적성이 어딨나? 적성이 밥 먹여주지 않는다는 건 요즘 초등학생들도 안다. 대한민국 초등학생 장래희망 1위에 끼 넘치는 ‘연예인(or 유튜버)’과 업무상 그 반대인 ‘공무원’이 불과 몇 년 사이에  극단적으로 혼재되어 있는데 말 다했지 뭐.


현실을 보자. 지방공무원 2017 경쟁률 데이터를 보니 대구의 경우 115.7대 1이었단다. 컵밥으로 상징되는 서울 노량진 고시촌의 고시생이나 공무원 수험생들 역시 고학력에도 불구하고 매년 이와 비슷한 악순환을 겪는다.


곧 죽어도 일반 회사의 조직생활에 적응해야만이 그래도 남들처럼(?) 먹고 산다는 불행한 결론에 다다른다. 조직에 적응하는데는 위선과 같은 요소가 불가피하다. 부적응을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그저 '체제의 순응'뿐.


회사라는 조직은
우리를 정서적으로 감싸주기 위해
존재하는 곳이 아니다.


선배는 상사의 눈치를, 상사는 또 그 상사나 사장의 눈치를 봐야 하는 구조에서 월급 한 달에 한 번 꼬박꼬박 받아 인생 버티며 살뿐이다. 많은 경우 그들에게 사명감 따윈 없다. 지옥을 견뎌낸 또라이만 있을 뿐. 혹 외롭더라도 그들에게 쉽사리 기대어선 안 된다. 믿음을 주되 믿어서는 안 된다. 이기적이 아닌 개인적이어야 하고 주체적인 독립이 필수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약치기그림

불현듯 제목의 직장퇴사론을 論이 아니라, loan으로 읽어 본다. 저당 잡힌 삶. 매일 퇴사를 꿈꾸며, 매일 안 주머니에 사직서를 품고 사는 삶. 세상은 이런 공감을 '하는 척' 하면서 실제로는 낙오자로 낙인찍는다. 하루아침에 구조의 문제를 바꾸지 못하니 손에 쥔 계란은 바위가 아니라, 내 주머니 속에서 힘없이 깨져 버릴 뿐이다.


그저 내가 못난 게 아닐까. 꾸준하지 못한 게 아닐까. 용기가 부족한 게 아닐까. 자신감은 점점 떨어지고 퇴사할 용기마저 없다. 모든 건 돈 때문이다. 월급이 자존감이다. 월급날에 올라가는 자존감은 그 어떤 마약보다 강하지 않은가.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아버지는 말하셨지, 인생을 즐겨라

여러분, 모두 부자 되세요

유행했던 광고 카피들은 저마다 우리의 심리를 조장했다. 과연 열심히 일한 '근로자'만이 떠날 자격이 있을까? 우리 모두는 자연인으로서도 떠날 자격이 있다. 열심히 일하지 않았대도 우린 인간으로서 보상받을 만큼의 노동은 나름 하지 않았는가? 인생을 즐겨라-하는 주체는? 신용카드사였다. 모두 부자 되세요? 마찬가지로 신용카드사였다. 근데 모두 부자가 되는 건 아무리 봐도 불가능하다. 누군가 취하면 누군가는 반드시 부족한 것이 자본주의의 현실이니까.


요즘 세태를 반영하는 베스트셀러가 떠드는 감성 돋는 말이나 충고 따위는 이런 연말에 어떤 따뜻함도 내게 전해주지 못 한다. 어떤 책은 신경을 끄라고 하지만 돈이 없는 한 신경은 온-오프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말의 온도나 품격은 물질적으로 풍족하고 마음이 여유로우면, 교육 받고 경험한 것이 교양으로 자동 발현되는 게 인간의 본성이다. 단지 욕망에는 끝이 없기에 ‘있는 것들이 더 하는’ 경우가 왕왕 있을 뿐.


나는 돈을 벌고 싶다.
 그러나 회사는 못 다니겠다.
(뭐 어쩌라고?)


맞다. 뭐 어쩌라는 건가. 김어준/류 근/이외수 선생님의 을 다 합해서 표현하자면 '인생은 그냥 조낸 시바 쫄지말고 존나게 버티는 수' 밖에 없다. 창업은 개뿔이다. 통장에 잔금이 만원 단위에 머물러 있다. 적금은 깬 지 오래다. 로또는 이번 주도 꽝이다. 월세 + 관리비 + 생활비만 해도 매달 100만 원은 훌쩍 나가는데, 월급은 한 달에 나가는 돈과 별반 차이가 없다. 내가 월세를 내기 위해 회사를 다니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이다. 월급은 합의된 (노예의)족쇄이다.

월급은 통장을 스칠 뿐

애석하지만 금수저도 아니다. 우리 부모님은 내게 물려줄(?) 돈 되는 땅이나 빌딩은 소유하지 않았다. 이게 비단 나만의 일일까. 특히 IMF 키즈 세대인 80년대 생이라면 더욱 공감할만한 현실적인 이야기다.

나는 왜 이 일을 하는가?를 거듭 물어 나온 답이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얼마나 우울한 일인가. 그래, 그렇다면 나는 왜 돈을 버는가? 주체적인 삶을 위해서다. 마음의 여유를 위해서다. 자존감을 위해서다. 그러니 회사를 당장 관두지 못하는 건 최선의 사치를 부리는 것이다. 시바.


이런 분위기 속에 연말 퇴사를 고민하는 이를 두고 함부로 말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렇게 힘들면 그냥 그만둬(동의어로 그만 징징대-가 있다)라거나, 그것도 못 참냐며 의지박약이라 충고하는 것 역시도 폭력이다. '다 버티며 사니까' 나도 버텨야만 할까? 이미 충분하다.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이 최선은 단순한 자기위로나 합리화의 단어가 아니다.


신입사원은 입사하고 수습기간 동안 조직생활에 돌입하는 것 자체부터 굴욕적 경험의 시작을 맞는다. 군인으로 비유하자면 필자의 경우, 쉬는 토요일에는 민간인이 되고, 강의를 주관하는 일요일에는 지휘관이 되며 출근하는 월요일에는 이등병이 되는(사회적 지위가 급전환되는)기분이랄까. 군대를 직간접으로 경험해본 이들은 알겠지만, 멀쩡한 사람도 이등병 계급이 되면 어리바리하게 된다. 그러다가도 계급장을 떼고 군복을 벗는 순간 자연인이 된다. 공식적으로 어떤 자격이 주어진다면 또 그걸 해낸다.

완장도 긍정으로 작용할 수 있는 법

인간은 본디 그런 존재다. 환경 속의 인간. 다수에게 인정받으면 뭐든 해내고, 다수 안에서 신입으로 규정되거나 반복적으로 낮아지면 잘하던 것도 버벅댄다. 1년 차 이하가 퇴사를 더욱 진중하게 고민하는 건 십분 이해한다. 2년 차 이상이라고 다른 건 없다. 다만 익숙해가는 고통에 안식을 빚으니 그마저 두려워하거나 아예 젖어 살거나 둘 중 하나다. 내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충성을 다했건만 돌아오거나 남은 건 대개 공허뿐인 현실이 자명하다. 어차피 영원이 없고 평생이 없을 유한함을 사전에 알았음에도 끝에 밀려오는 공허함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으랴.


이런 가운데 뉴스에 나오는 타인의 고통에, 종소리 울리는 구세군의 빨간 이웃 돕기 성금함에 어떻게 공감하며 선뜻 내 손을 내밀 수가 있을까? 먼저 내가 고통스럽고, 내가 도움을 받을 이웃인데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니 말이다. 아프다고 징징댈 사람도 없다. SNS에서 하는 괜찮은 척 잘사는 척 연기도 한 몫한다. 위선은 환경 속의 인간에게 필요악인지도 모르겠다.

혹시 passion(열정)이란 말어원을 아는가? '고통'이라는 어원을 갖고 있다. 거기에 'compassion(연민)'이라는 단어는 com-(함께-를 뜻하는 접두어)로 이해하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직장에서의 나는 나를 위한 열정을 발휘하기도 전에 나를 잃은 고통에 머물러 있다. 누군가의 고통을 돌아볼 겨를이 없는 것이다. 나를 사랑해야 세상이 보이는데, 내 안의 온도가 따뜻해야 외부세계의 온도가 시린 것을 실감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세상이 예쁘게 돌아가려면 모두가 자신을 찾아가는 열정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하며, 그 고통의 보상이 자아를 실현하는 것이어야 하리라. 우리 대다수가 타인의 고통에도 기꺼이 열정을 발휘할 수 있을 때, 가장 좋은 사회가 되지 않을까?

경쟁보다 도전정신

모든 것이 구조적 문제라고 툴툴대 봤자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다. 투표를 잘 하더라도 조금씩 합리적이고 부분적으로 바뀔 뿐 당장 퇴사를 고민하는 나에게 와 닿는 건 거의 없다. 실제로 나 개인의 문제도 있기 때문이다. 나의 노오력이 세상을 뒤집을 수는 없지만 내 관점을 뒤집을 수는 있으니 말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노오력의 전제는 경쟁심이 아니라, 도전정신이다. 누군가를 밟고 오르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에 과감히 뛰어들며 나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정신승리에 달렸다는 말이다.


실망스러운가? 퇴사를 논하는데 겨우 대안이라고 내놓은 게 정신승리를 하라고? 반문이 들 수 있다. 필자가 말하는 정신승리란 무조건 버티라는 게 아니라, 삶의 전제를 고통으로 바라보고, 인생을 길게 보자는 거다. 인생, 생각보다 길다. 다시 강조하지만 난 독립적 주체가 되어야 한다. 돈이 문제인 걸 해소하려면 최소한 내 욕구를 해결할 수 있을 정도 만큼만 욕망을 적정치로 조절해야 한다. 여러가지의 욕망을 몇 가지로만 집중해서 필요도 내지는 의존도를 낮춰야 한다는 말이다. 우선순위를 정해 차근차근 정리해야 한다. 언제나 잭팟은 마음을 비웠을 때 터지는 게 진리이므로.

서울경제

진짜 결론이다. 지금 퇴사를 고민하고 있다면 12월도 다 가고 있는 판에 더 이상 미루지 말자. 3월에 그만둔다 해도 최소 2월까지는 데드라인을 잡고 내 안에 확답을 내려야 한다. 당신의 결정은 결국 회사에 전달이 되어야만 한다.(퇴사가 아니라 다시 몸과 마음을 바친다 해도 마찬가지다)만약 기승전-퇴사라면 최소한의 예의를 차리기 위해서라도 한 달 전에는 회사 측에 통보해야 하기에 그렇다. (물론 이건 회사입장이다)


짧게 다녔든 길게 다녔든 무관하게 전 직장이란 자고로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바닥은 그리 넓지 않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다시 마주쳐야 할지 모른다. 이전 관계가 새로운 관계와 건너 관계로 이어져도 골치 아프다.또한 퇴사 후가 막연해서는 아무것도 안 된다. 이다음 계획은 없더라도 다음 목표 정도는 최대한 구체적으로 세워둬야 한다.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더라도 말이다. 지금 돈이 없으면 퇴사한 후에는 돈이 더 없을 테니까. 아니라면 최소한의 생존으로 시작할 수 있는 정말 내가 사랑하는 일을 좇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만 보탠다. 만약 퇴사 후에 월급쟁이가 그립다면 다시 취업해야 하는 사태가 빚어진다. 결단에는 최후의 각오가 반드시 따른다. 인생이란 이러한 각오의 연속이다. '어차피'라는 건 없다. 다시 시작해야 한다면 고통 속에 피어나기를 각오해야 한다. 어떤 꽃도 지기 위해 피어나지는 않으니까.(이동영)

매거진의 이전글 붙잡지 마세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