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홍상수 영화 속 명대사 베스트 3
미국의 우디 앨런 감독(81)과 한국의 홍상수 감독(56)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남자다, 안경을 썼다, 영어를 잘한다, 셔츠와 면바지 차림을 선호한다는 점 외에도 자신을 거울처럼 비추는 자기 풍자적 작품을 만드는 지성인이라는 점, 만날 똑같은 영화만 만들어 더 이상 할 말이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은데도 일일신우일신(日日新又日新) 진화한다는 점, 몇 사람 안 보는 영화지만 확고부동한 열혈 팬을 확보했다는 점, 그리고 젊은 여성과의 염문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는 점이 그것이다. 앨런은 동거했던 여배우 미아 패로가 과거 입양한 한국계 여성 순이와 사랑에 빠져 결혼했고, 홍상수는 자기 작품에 출연한 34세 여배우와 사랑 중인 것으로 알려진다. 두 사람 모두 스캔들로 세상의 지탄을 받았지만, 그들의 작품처럼 스스로에게 무섭도록 솔직한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예술가란 점도 공통된다.
앨런의 최신작 ‘이레셔널 맨(Irrational Man)’은 이성(理性)을 신봉해온 철학 교수가 지식의 무기력함을 깨달으며 비관주의에 빠지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그는 사회적으로 비난받는 한 판사를 살해함으로써 ‘지식이 아닌 살인을 통해 세상을 바꾸었다’는 새로운 성취감에 취해 비이성적으로 변해 가다 결국 자멸한다. 윤리학을 가르치는 철학 교수의 비윤리적 행위를 통해 지식인의 자기모순을 풍자하는 이 블랙코미디를 보노라면 앨런이 쓴, 철학 교수의 무지하게 현학적인 다음 대사는 그 자체로 지성인의 지적 우월감이 얼마나 기만적인지를 신랄하게 비꼬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칸트가 만들어낸 완벽한 도덕세계에선 거짓말이 불가능하지.
거짓말은 정언명령에 위배되기 때문이야.
그렇다면 안네 프랑크와 가족이 2층 다락방에 숨어 있는데,
잡으러 온 나치에게 ‘저기 2층에 숨어 있어요’라고
솔직하게 말해야 된다는 거지.
철학은 언어적 자위행위일 뿐이야.
(철학 교수)
이 대사를 원용하자면 홍상수도 칸트의 정언명령에 따르는, 거짓말 못하는 예술가라고 하겠다. 그는 영화 속 등장인물의 대사를 통해 자신의 철학과 경험과 본능을 대놓고 드러내는가 하면, 지성인인 체하는 자신이 갖는 모순을 조롱하는 데도 거침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홍상수 영화 속 명대사 베스트 3는 이렇다.
먼저 3위. “제 영화 속에는 여러분이 좋아하는 드라마나 서사도 없고, 교훈이나 메시지도 없거나 불확실합니다. 제 능력과 기질은 하나밖에 못하는 겁니다. 정말로 (내가) 몰라서 (영화 만드는 작업에) 들어가야 하고, 그 과정이 정말로 발견하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제가 컨트롤하는 게 아니라 그 과정이 나로 하여금 계속 뭔가를 발견하도록 하고, 저는 그냥 그걸 하나의 덩어리로 만드는 것뿐입니다.”
영화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서 “왜 난해한 영화를 계속 만드느냐”는 영화학도의 질문에 대한 영화감독의 대답. 기실은 홍상수 자신의 답변이나 다름없다. ‘과정’ ‘발견’ ‘덩어리’와 더불어 ‘조각’과 같은 단어들은 홍상수가 대사에 자주 사용하는 단어들인데, 모호해서 더욱 있어 보인다.
개념화된 단어를 사용해 상대를 카오스에 빠뜨리며 설득에 성공하는 이런 기술은 다른 여자가 생겨 아내에게 이혼을 통보할 계획인 남편들이 참고할 만하다. 이렇게. “여보. 결혼생활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과정이 정말로 발견하는 과정이어야 해. 그래야 난 그 과정에서 의미라는 하나의 덩어리를 만들어낼 수 있으니까. 그런데 우리 결혼생활은 이제 어떤 과정도 발견할 수가 없어. 고통스러워. 죽고 싶을 만큼. 그러니까 이혼해.” 어떤가. 매우 형이상학적인 이혼 통보가 아닌가 말이다.
2위는 ‘옥희의 영화’에서 “선생님, 성욕은 어떻게 이겨 내세요?”라는 질문에 대한 영화감독의 답변이다. “누가 이겨낸다고 그랬어? 누가 성욕한테 이기냐? 너 그런 사람 본 적 있어? 그런 사람 있다고 얘기나 들어본 적 있어? 안 돼! 그러니까 고민하지 마!”
아, 얼마나 솔직담백한가. “너의 모든 것을 다 빨아버리고 싶다”(‘오! 수정’) “신음소리가 너무 예뻐요”(‘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와 더불어 본능을 200% 드러내는 홍상수의 명대사가 아닐 수 없다. 불학무식한 자가 이런 얘기를 꺼내면 ‘저질 중 저질’ 취급을 받겠지만 지성인이 이런 말을 대뜸 꺼내면 지성과 번뇌의 허물을 벗어던지고 이젠 욕망과 내면의 명령에 충실하며 살아가겠다는 지식인의 자기 혁명으로 느껴지지 않는가 말이다. 생각해보라. 칸트가 “나 너랑 자고 싶어. 롸잇나우!”라고 말한다면, 이 얼마나 정언명령에 충실하고 멋져 보이겠는가 말이다.
마지막 1위는 ‘생활의 발견’에 나오는 주인공의 대사다. “우리, 사람은 못 되어도, 괴물은 되지 말자….” 마음에 솔직하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도 소중한 일인가. 하지만 비록 패배할지라도 괴물 같은 나의 본능과 욕망에 끝까지 저항하는 것도 지식인의 사명이 아닐까. 우리, 사람은 못 되어도 괴물은 되지 말자고요.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