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숙종은 15대가 아닌 14대 임금이라 자처했는가?

고려 숙종의 의도적인 망각

by 동두

2001년 통전이란 책이 일본 궁내청 서릉부에서 발견되었습니다. 통전은 중국 송대에 만들어진 역사책인데 보통 동아시아의 역사책이 군주를 기준으로 군주나 대신들의 업적을 서술한데 비해 이 책은 경제, 관직, 예법 등의 제도사에 대한 책입니다. 그래서 역사서를 정치에 활용하던 중국이나 한국에서 대단히 많이 읽힌 책인지라 희귀한 책이라 볼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 책의 발견이 주목받은 이유는 장서인이 찍혀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장서인은 책이나 그림, 글씨의 소장자가 자기의 소유임을 나타내기 위해 찍는 도장입니다. 도서관에서 대출, 관리하기 용이하게 바코드 스티커를 붙인 걸 볼 수 있을 겁니다. 그 스티커에는 바코드 외에 XX도서관이라고 글귀를 보셨을 겁니다. 책의 소장처를 알려주기 위함이죠. 2001년에 발견된 통전은 고려 왕실이 소장하고 있다는 내용이 담긴 장서인이 찍혀져 있었던 것입니다.



<출처 : 중앙일보>


高麗國 十四葉 辛巳歲 御藏書 大宋建中靖國 元年 大遼乾通 元年

고려국 십사대 신사년 어장서 대송건중정국 원년 대요건통 원년


궁내청 서릉부에서 발견된 통전에 찍힌 장서인의 내용은 위와 같습니다. 이 글귀에서 당대 사회상에 대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 습니다. 그 중 십사엽(十四葉)이란 단어에 주목해 봅시다.

십사는 숫자고 엽은 세대 혹은 후손이란 의미입니다. 그래서 고려국 십사엽 신사세 어장서란 고려국 십사대 임금이 재위하는 신사년에 왕실에서 이 책을 보관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뒤에 따라 붙는 대송건중정국 원년과 대요건통 원년은 각기 송과 요의 연호를 말합니다.

그런데 고려 14대 왕은 헌종입니다. 그런데 학자들은 이 책을 숙종시기에 만들어진 책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헌종 재위기간은 1094년부터 1095까지. 이 기간 동안 신사년은 없습니다. 게다가 헌종 재위기간에는 송과 요에서 각기 건중정국과 건통이란 연호가 쓰이지 않았습니다. 송의 건중정국 원년과 요의 건통 원년은 모두 1101년을 가리키므로 숙종 6년의 일입니다. 그런데 숙종은 15대 임금이죠. 그럼 왜 14대라고 쓴 것일까요?

일단 장서인을 만든 사람이 실수로 잘못 만들지 않았을까 하는 가정을 하게 됩니다. 본래 고서에는 오기가 많기 때문에 충분히 고려할 만한 가정입니다. 하지만 숙종 재위기간을 생각하면 잘못 썻을 가능성은 낮지 않을까 합니다. 왜 그런지 숙종의 즉위과정을 살펴보도록 하죠.


숙종은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자의의 난을 진압하고 왕위에 오른 것이지요. 헌종은 11살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나이도 어린데다 몸도 허약했다고 합니다. 자연스럽게 권신이었던 인주이씨 가문의 이자의와 헌종의 숙부였던 계림공이 후계구도의 주도권을 두고 대립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자의는 자신의 조카인 한산후 왕윤을 왕위에 올리려 했고 계림공은 이를 역모라고 판단하여 이자의 일파를 제거하였습니다. 그리고 곧 헌종에게 양위를 받아 계림공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숙종입니다. 그리고 전왕인 헌종은 2년 뒤에 죽습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본 이야기 아닙니까? 조선시대 수양대군이 김종서 일파를 몰아내고 어린 단종에게 양위 받은 것과 구도가 유사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후대에 학자들 중엔 이자의가 역모를 꾀한 것이 아니라 계림공이 반란을 일으켜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 데 장애물이었던 이자의를 제거했다는 견해를 내놓는 학자도 있습니다.


숙종도 자신이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왕위에 올랐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왕권 강화를 위해 부단히 애를 씁니다. 숙종대 계획되었던 여진정벌, 동전 발행, 국학을 중심으로 한 유교교육 강화 등이 그 예입니다. 특히 서적포를 두어 서책을 출판하는 등의 행위는 지방의 사학을 누르고 중앙의 국학을 강화시키려는 것인데 이런 중차대한 일에 도장을 잘못 파서 찍는 다는 것이 용납이 될지 의문입니다. 14대라고 한 것은 실수가 아니라 정치적 의도가 담겨 있다 보는 게 나을 듯합니다.


그것은 숙종이 헌종을 합법적인 왕으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노력한 점입니다. 그래야 본인의 쿠데타 행위가 희석될 것이니까요. 실제 그러한 정황은 여러 기록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숙종은 분명 헌종에게 양위를 받을 때 현왕인 숙종과 전왕인 헌종의 이름으로 요에 사신을 보내 양위의 정당성을 받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양위 후 2년 만에 헌종이 죽자 숙종은 헌종의 죽음을 요에 알리는 고애사라는 사절단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통상 왕이 죽으면 상국에 알리는 것이 관례임에도 사신을 파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뿐 만이 아니죠. 헌종이라는 묘호도 숙종 당대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다음 왕인 예종대 가서야 만들어졌습니다. 물론 조선에서 노산군이 죽고 한참 있다 숙종대 가서야 단종이란 묘호가 내려진 것보다는 빠릅니다만 어찌됐든지 간에 숙종은 헌종에게 묘호를 내려주지 않을 만큼 왕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음이 분명합니다.


이렇게 통전에 찍힌 장서인에 숙종을 14대 임금이라고 한 점은 결국 숙종의 왕위 계승을 정당화하여 왕권강화를 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듯합니다. 이는 후대에 세종이 왕위 계승의 정당성을 위해 선대왕인 공정대왕(숙종 때 정종이란 묘호를 받음)을 임금으로 인정하지 않아 자신의 공덕을 찬양하는 용비어천가를 공정대왕을 뺀 것과 일맥상통하지 않나 합니다.



이렇게 장서인을 통해 당대 사회 분위기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 밖에도 송과 요의 연호가 함께 나온 점, 조선왕조실록의 기록과 실제 발견된 장서인이 찍힌 도서의 차이, 고려 어장서가 일본으로 건너간 사연, 고려 왕실에서 통전을 보관한 이유 등을 살피면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지만 다음 글로 넘기도록 하겠습니다.

참고문헌

한민족대백과사전

https://news.joins.com/article/4075549

김남규(1996), 「高麗中葉의 對女眞政策-宣宗, 肅宗代를 중심으로-」, 『가라문화』제13권

박연호(2009), 「고려 시대의 도회(都會)에 대하여 – 숙종, 인종 대 교육 진홍책의 맥락에서-」, 『교육사연구』, 제19집 1호

남인국(1983), 「고려 숙종의 즉위과정과 왕권강화」,『국사교육론집』제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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