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문덕 활용하기

잊혀진 을지문덕

by 동두

질문 한 번 해보겠습니다. 을지문덕의 성은 뭘까요? 을씨일까요 아니면 을지씨일까요? 그것도 아니면 고대 삼국시대의 여러 인물들처럼 성이 아예 없는 것일까요?혹은 성은 있지만 알려지지 않고 이름만 전해오는 걸까요?안타깝게도 답은 알 수 없습니다. 을지문덕의 성과 이름을 분리시켜 알려 주는 기록은 없기 때문입니다.



어디 이름뿐이겠습니까? 언제 태어났고 고향은 어디며 아버지와 어머니는 또 누군지, 자녀는 몇이며 무덤은 어딨는지 알려주는 기록도 전무합니다.



물론 신증동국여지승람과 해동명장전, 목천돈씨 족보 등에는 을지문덕의 신변과 가계에 대한 기록이 있긴 있습니다. 이 사서들의 기록을 종합하자면 을지문덕의 성은 을이나 을지씨며 평양에서 세거 한 듯하며 고려 시대에도 을지문덕의 후손이 존재했었던 듯합니다. 그러나 예시로 든 사서의 기록은 을지문덕이 활약하던 당시의 사서도 아니고 조선시대에서야 비로소 나타난지라 역사적 신빙성은 떨어지지 않나 합니다. 이 사서들의 을지문덕 관련 내용은 나중에 을지문덕이 유명해지고 나서 만들어졌을 가능성을 배제하긴 힘듭니다. 이 부분에 대해선 후에 기술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을지문덕은 수의 침입에 맞서 싸운 전쟁영웅입니다. 특히 을지문덕이 활약했던 수의 2차 침입의 경우 113만 3800명이 침입했습니다. 이 병력이 순수한 전투 병력만 포함된 것이 아니라 보급 부대의 숫자가 포함된 수라 가정하더라도 중국 역사상 아니 세계 역사상 가장 많은 수로 구성된 해외 원정군이었습니다. 이런 대군을 상대로 결정적으로 승리를 이끈 을지문덕에 대한 기록이 이렇게나 없다는 건 정말 이상한 일 아닙니까?



사실 을지문덕뿐만이 아니죠. 여기서 조금 더 살펴봅시다. 4차례에 걸쳐 일어난 고구려와 수와의 전쟁에서 활약한 고구려 측 장수들도 마찬가집니다. 사실 모릅니다. 이름이 알려진 건 앞서 언급한 을지문덕, 당시 고구려왕인 영양왕, 영양왕의 동생이자 뒷날 영류왕으로 즉위하는 고건무 셋 뿐입니다. 참고로 고건무도 명장으로 수의 내호아가 이끄는 4만 수군을 고구려 도성인 장안성 부근에서 500명의 병사로 격퇴시킨 사람입니다. 이 밖에 강이식이란 장수도 있었다 하지만 역시 후대 역사서인 조선상고사와 진주강씨 족보에서만 나와 실존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습니다.



반면 수는 여러 인물들이 알려져 있습니다. 고구려와 수와의 두 번째 전쟁인 2차 여수전쟁만 놓고 봐도 수많은 인물들이 알려져 있죠. 우선 요하를 건너다 고구려군에 의해 전사한 맥철장, 전사웅, 맹차, 요하를 건너기 위해 부교를 제작하는데 관여한 우문개와 하조, 살수대첩과 관련 있는 우중문과 우문술, 우중문의 진지를 염탐하려 온 을지문덕을 풀어주자 주장한 유사룡, 살수대첩 후 전사한 신세웅, 고구려 도성인 장안성을 직접 공격한 내호아와 고구려의 유인책에 걸린 주법상, 고구려의 성을 무시하고 평양으로 직접 공격하자고 주장한 뒤 행군 도중에 죽은 단문진, 모든 걸 지휘한 수양제 양광 등등 많은 장수의 행적과 이름이 전합니다.



이렇게 수의 인물과 고구려의 인물이 불균형하게 전해지는 건 여수전쟁 사료가 거의 전적으로 중국 사료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삼국시대 역사를 다룬 삼국사기는 분명 우리 역사서이긴 하지만 적어도 고구려 후기를 다룬 부분에선 압도적으로 아니 거의 전적으로 중국 사서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삼국사기. 우리측 문헌뿐 아니라 중국측 문헌도 상당부분 참고하여 만들어졌다.(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예를 들어 장수왕은 우리 역사상 가장 장수한 왕이라 재위 기간도 길고 한반도와 중국의 국제 정세 속에 균형을 잡고 동북아의 패권을 이룩한 왕입니다. 그만큼 기록이 상세해야 정상이나 삼국사기 속 장수왕의 재위 기간을 보면 중국에 조공했다는 식의 단편적인 기록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장수왕보다 선대 임금인 고국천왕대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우씨부인의 방문부터 발기의 반란 진압, 진대법을 시행한 이야기, 주통천 여인과의 관계 등 수많은 이야깃거리가 실려 있습니다.

이렇게 두 명의 왕을 예시로 들긴 했지만 삼국사기의 고구려 전반기의 기록은 각 왕의 에피소드나 고구려 고유 기록이 상세한 반면 고구려 후기의 왕은 중국 기록을 거의 의존하다시피 합니다.



통상 역사는 고대사로 갈수록 사료가 적고 후대로 내려올수록 사료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 시기까지 천년의 역사를 다룬 역사서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은 합쳐서 11권입니다. 옛날에는 내용을 기준으로 권을, 물리적인 권수를 나타내는 것이 책이므로 오늘날 11권은 예전에는 11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반면 조선 세조는 고작 13년을 재위했는데 이 13년의 치세를 다룬 세조실록은 18책이 전해보고 있습니다. 기록의 밀도를 따지면 천년의 간의 역사기록보다 2배 이상 많죠.



또 동아시아에서 역사책 편찬 전통을 보면 후금박고라 하여 후대 일을 상세히 쓰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이는 사마천이 사기를 지을 때 확립되었는데 실제 사마천은 자신이 살고 있던 전한 시기의 역사를 상고 시기보다 상세히 기록하였죠. 이러한 전통은 중국과 변경을 접해 상대적으로 중국 문물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고구려에도 전해졌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럼에도 고구려 후기 특히 수와의 전쟁과 관련된 고구려 측 사료가 적은 것은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고구려에 사료가 있었는데 전란이나 정치적 변동으로 소실되어 전해내려오지 않을 가능성, 또 고구려 후기를 다룬 고구려의 역사책이 편찬되지 않았을 가능성입니다. 이 두가지는 상충하는 듯 보여도 실제로는 상호 보완하여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일단 고구려의 역사서로 백 권의 유기와 5권의 신집이 있는데 유기를 정리한 게 신집입니다. 신집이 편찬된 시기는 영양왕 11년인 600년으로 을지문덕이 살수대첩을 승리로 이끈 613년보다 13년 전의 일입니다. 이 때 편찬된 신집에는 살수대첩이나 을지문덕과 관련된 이야기가 없었을 겁니다. 사실 학계에서도 신집은 고구려 전기 역사를 다룬 책으로 삼국사기의 고구려 본기 전기 기록의 원본이 되었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즉 유기나 신집 모두 고구려 전기의 기록이란 말이죠.



여하튼 신집 이후 고구려에서 관찬 역사서를 편찬한 기록은 없습니다. 이 말은 즉 삼국사기가 편찬될 무렵 고구려 전기 사료는 내려오고 있었지만 고구려 후기를 다룬 역사책을 만들기 위한 재료인 사료가 산실 되었음을 말하는 것일 겁니다. 그래도 의문이 듭니다. 당대 기록은 종합하여 보존하지 않으면 사라지기 때문에 기록을 보존하는 주요한 방법 중 하나는 역사서를 편찬하여 보관 혹은 보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관찬 역사서를 만들지 못했고 그로 인해 고구려 후기와 관련된 기록들이 사라졌을 것입니다. 왜 고구려 후기에 역사책을 편찬하지 않고 기록이 상실되게 놔둔 걸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여력이 없어서입니다. 수와의 전쟁 이후 후유증이 컸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수 전쟁 때 고구려가 썼던 전법은 청야 전술인데 이는 백성들을 성안으로 피난시키고 성 밖의 논밭을 불태우고 우물에 독을 타는 등 보급을 끊어버리는 효과를 냅니다. 실제 임진왜란에서 조선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가 이순신 함대가 바다에서 의병이 육지에서 일본군의 보급 물자를 끊어버려 전쟁 수행을 곤란하게 했기 때문이죠.



수역시 과중한 보급 물자를 무리하게 병사들로 하여금 짊어지게 하거나 평양성을 공략하기보다 요동성 등 고구려 성을 함락시키는 데 집착한 건 모두 보급과 관련이 있죠. 고구려의 청야전으로 고구려 땅에선 물자를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죠. 이는 고구려가 수에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입니다.



그런데 전쟁은 승리해도 내부적으로는 전란으로 황폐해졌기 때문에 내부적으로 전후 복구를 해야 합니다. 영류왕이 당에 대해 비굴할 정도로 유화책을 펼쳤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니 역사책을 편찬할 여력이 없겠죠. 그런데 곧바로 연개소문의 정변이 있고 왕과 수많은 관리들이 살해당합니다. 이 정변을 핑계로 당태종은 고구려를 침략하고 고구려는 당과의 3차례 전쟁을 펼치게 되죠. 그 와중에 연개소문 사후 남생과 남건, 남산 형제의 불화 그 후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하는 등 여수전쟁에 관련한 역사를 정리할 시간이 없었을 겁니다. 만약 자료들을 종합하여 역사서라도 편찬하여 고구려 후기 역사자료의 산실을 막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이에 을지문덕에 대한 기록은 잊혀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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