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호동왕자

고구려 대무신왕의 태자 호동

by 한휼
04_고구려_03_호동-07_20230121_140458.jpg 고구려 호동 왕자 일러스트


고구려 호동태자(好童太子)

호동은 고구려 3대 태왕 대무신왕과 둘째 부인 해씨(解氏)의 장남이다. 어머니는 부여의 금와왕의 아들이며 갈사부여를 세운 갈사왕(曷思王)의 손녀이다. 호동은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서기 32년에 왕명에 의해 자결했다. 태자에 책봉되지도 못했을뿐더러 부왕보다 먼저 죽었기 때문에 왕위를 잇지 못했다.



[장남 호동 왕자]

호동은 얼굴이 아름답고 왕이 총애하여 호동이라 이름 지었다. 대무신왕의 첫째 부인에게도 아들 해우(解憂)가 있었는데 호동보다는 나이가 어렸다. 이후의 행보로 보면 호동과 해우는 나이 차이가 어느 정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호동은 태자에 책봉되진 않았으나 대무신왕의 장남이었고 정치에도 참여했으니 실질적으로는 태자였다고 볼 수 있다. 장남이면서 공적도 있었으나 원비였던 왕후의 핍박을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이로 보아 호동의 생모 해씨는 오래 살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외국에서 온 인물이었으니 정치적으로 외척의 세력을 힘입을 수 없었을 것이다. 유능했으나 단신으로 세력 기반이 없었으니 왕위를 잇기 어려웠을 것이다. 선대 유리왕 역시 고구려 건국 이후 부여에서 건너와서 세력은 약했으나 태왕 주몽의 도움이 있어 왕위를 이을 수 있었다. 하지만 호동의 경우는 외척의 도움도, 대무신왕의 지원이 없었기 때문에 정치인으로서 행보를 오래 이어갈 수 없었다.



[호동 왕자와 낙랑국]

서기 32년 4월. 호동이 옥저 지역을 유람하고 있었다. 그때 낙랑국(樂浪國) 국왕 최리(崔理)가 그곳에서 지나다가 호동을 만나서 데리고 간 뒤 딸을 주어 아내로 삼게 했다. 그 후에 호동이 고구려로 돌아와서 아내 낙랑공주(樂浪公主)에게 사자를 보냈다. 예로부터 낙랑에는 적병이 쳐들어오면 저절로 소리가 나는 북과 나팔 곧 자명고(自鳴鼓)와 자명각(自鳴角)이 있었는데 그것을 낙랑공주에게 부수도록 했다. 낙랑공주는 무기고에 몰래 들어가 칼로 북을 찢고 나팔을 입으로 베어 버린 후 호동에게 알렸다. 이에 호동이 아버지 대무신왕에게 고하여 낙랑국을 습격하게 했다. 낙랑국은 북과 나팔이 불리지 않아 방비하지 못했고, 고구려 군대가 성 밑까지 이른 뒤에야 북과 나팔이 모두 부서진 것을 알았다. 낙랑국 국왕은 나라를 배신한 공주를 죽이고 5년을 항전했으나 끝내 버티지 못하고 서기 37년에 성에서 나와 항복했다.



[모략과 최후]

서기 32년 11월. 대무신왕의 첫째 왕후가 호동이 태자가 될 것을 염려하여 자신을 욕보였다고 왕에게 참소했다. 이에 왕이 호동이 다른 사람의 소생이라고 미워하는 것이냐고 책망하니, 왕후가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울며 강권으로 참소했다. 이에 왕에게도 의심이 생겼다. 이를 안 한 사람이 호동에게 왜 해명하지 않는지 물으니 대답하기를, 만일 해명한다면 어머니의 죄악을 드러내는 것이며 부왕에게 근심을 더해주는 것이니 효가 아니라고 하고 칼로 자결했다. 결국 태자의 자리는 동생 해우에게 돌아가니, 그가 바로 고구려의 5대 태왕 모본왕이다. 3대인 대무신왕에 이어서 바로 4대 태왕으로 등극하지 못한 이유는 대무신왕 사망 당시 모본왕이 어렸기 때문에 사람들이 대무신왕의 동생인 민중왕을 세웠기 때문이었다.


대무신왕과 호동과 모본왕, 그리고 대무신왕의 동생으로 모본왕을 대신하여 왕위를 이은 민중왕에 대해서는 수수께끼인 부분이 있다. 4대 민중왕과 5대 모본왕에 대해서는 이후 모본왕의 태자 익에 대해 서술할 때 언급하도록 하겠다. 우선 먼저 언급할 것은, 대무신왕과 호동의 나이에 대해 이상한 부분이 있다. 대무신왕은 서기 4년에 태어나 44년에 죽었다. 또 호동왕자가 죽은 것은 서기 32년이다. 호동이 죽은 32년에 대무신왕의 나이는 29살이었다는 말이 된다. 대무신왕의 두 아들의 출생연도와 나이는 기록에 남아있지 않아 호동이 몇 살에 죽었는지, 대무신왕이 죽고 태자 모본왕이 어리다는 이유로 동생 민중왕이 왕위에 오를 때 모본왕이 몇 살이었는지 알 수 없다. 우선 호동에 대해 먼저 살펴보면, 서기 32년에 호동은 낙랑의 공주와 혼인했다. 정략결혼의 형태일 것으로 보아 보통의 결혼 연령보다 어렸을 수도 있지만 일단은 10살은 넘은 나이였을 것이다. 아들 호동이 10대 초반에서 중반 즈음의 나이였을 무렵에 아버지 대무신왕의 나이는 29살이었다. 호동을 낳았을 때 대무신왕의 나이 역시 10대 초반에서 중반의 나이였을 것이라는 말이 된다. 도절, 해명, 대무신왕, 호동 등 고구려 초기의 인물들의 활약 나이가 너무 어린 것을 알 수 있다. 또 이후에 언급하겠지만 대무신왕의 아들이며 호동의 동생인 모본왕도 나이가 어려서 국인들이 대무신왕의 동생 민중왕을 옹립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때 모본왕의 추정되는 연령대 역시 이상한 점이 있다. 이로 보아 초기 고구려에 대한 기록의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추정도 가능하다.



[돌아보며]

호동은 그 역량과 능력이 매우 안타깝다고 생각한다. 지략으로써 적을 무너뜨리는 능력을 가졌고 그로써 국가에 공헌했다. 하지만 사적인 효성으로 인해 대의를 그르쳤다. 모후에게 불효하지 않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림으로써 그 모후의 악명을 역사에 남게 했으니 이는 효성도 버린 것이며 국가의 대계도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무엇보다 호동의 활약 당시 그 어미가 보위를 잇게 하고 싶어 했던 아들은 5대 모본왕이다. 그는 고구려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폐위된 폭군으로 기록됐다. 호동의 죽음은 그저 애석할 뿐 이득은커녕 손해만 가득한 사건이었다. 호동은 공사를 구분하지 못함으로써 역사에 아쉬움을 남겼다.


역사의 기록만 두고 본다면 위의 기록으로 평가를 마칠 수 있겠지만, 서두에 언급했던 것처럼 기록되지 않은 이면의 현실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호동은 낙랑공주를 이용하여 낙랑국을 멸망으로 몰아갔다. 이는 낙랑공주에게 있어서는 아버지에게는 불효였고 국가에게는 배신이요 매국이었다. 이런 일을 지시한 것으로 보아, 호동이 과연 효성이나 인애와 같은 것에 목숨을 걸 만큼 집착했을까 의문이 든다. 호동의 어머니는 갈사부여 출신으로 외국인 신분이었다. 갈사부여에 대해 설명하기 전에 언급해야 할 사건은 동부여 대소왕의 죽음이다. 고구려 초기부터 대립해온 동부여의 대소왕은 대무신왕 시대에 결국 전쟁을 벌였다. 그 결과 서기 22년 2월에 전쟁 중에 죽었다. 이 사건으로 고구려에 정복당하지는 않았으나 국왕을 전쟁으로 잃은 동부여는 분열되었고 급격히 쇠퇴했다. 이때 대소왕의 동생이 부여에서 나와 갈사부여를 세웠다. 이 동생의 이름은 기록에 없기 때문에 세운 나라의 이름을 따서 갈사왕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갈사왕의 손녀가 바로 호동의 친어머니이다. 따라서 호동의 외가는 적국에서 갈라져 나온 소국의 왕실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 역시 오래 살지 못했으니 호동은 정치적으로 세력을 형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덧붙여 아버지인 대무신왕 역시 특별한 지원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무신왕 본인 역시도 아버지 유리왕에 의해 태자였던 도절과 해명 두 형이 제거된 뒤에 후계자가 되어 왕위를 이었으니 보고 배운 것이 있었을 것이다. 별다른 지지 세력도 없이 공로를 쌓아가던 아들 호동이 어떻게 보였을까? 호동은 자신의 아들이기도 했으나 적국 부여의 왕실의 후손이기도 했고, 정복하려 욕심을 내던 낙랑의 사위이기도 했다. 혹시 호동을 중심으로 새로운 정치 세력이 형성되어 국론이 분열될 것을 우려했던 것이 아닐까?


여기서 서술을 마친다면 별달리 교훈으로 삼을 점이 없을 것이다. 호동에 초점을 맞춰서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고 적용할 점을 찾아보면 무엇이 보일까. 나라의 운영이나 개인의 처세나 모두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다. 조직에서 리더로서 일할 때도, 구성원으로서 책무를 다할 때도 사람과의 관계가 중요하다. 어떤 조직에서 일할 때 사람들과의 관계는 신경 쓰지 않고 업무에만 열중한다면 어떻게 될까? 물론 그 개인은 성장할 것이고 나름의 결과를 만들어낼 것이다. 그리고 그 노력과 열정과 성과가 높으면 높을수록 아이러니하게도 더욱 고립되어간다. 주변의 질시나 질투가 문제가 아니다. 같은 조직에 속한 주변 사람들에게 악의가 없더라고 교류 없는 노력과 성과는 그 사람을 고립시켜간다. 어떤 조직이라도 모든 구성원이 엄청난 열정을 갖고 최선의 노력을 하지는 않는다. 그런 사람의 입장에서 같은 소속의 사람이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무섭게 성장해간다면 어떤 느낌이 들 것 같은가.


예를 들어, 어떤 인문계 고등학교에 미대입시를 준비하는 미술부가 있고 그중에 유독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 있다고 해보자. 한 학생은 유독 성적 관리도 열심히 하고 그림도 열심히 그리고 미대입시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는 등 열심히 입시에 임하고 나머지 다수의 부원들은 적당히 평범하게 공부하고 그림을 연습하고 정보에 대해서도 알려주면 듣는 정도에 그친다면 그 조직은 어떤 모습을 보이게 될까? 참고로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미술부와 같이 특정 진로를 목표로 한 부서는 적은 숫자의 구성원들이 항상 같이 활동하기 때문에 결집력과 동질감이 기본적으로 강한 편이다. 이런 조직에서 한 학생은 유독 열심히 하고 나머지는 유사한 수준이라면 그 한 학생은 한 것이라고는 진로에 열심히 노력한 것밖에 없는데도 시간이 갈수록 혼자가 되어간다. 그리고 나머지는 겉으로는 그 한 학생을 열심히 하는 우등생으로, 귀감이 되는 모범생으로 추켜올려주지만, 어느 순간인가부터 그 학생과 자신들 사이에 선을 긋고 유사한 수준의 학생들끼리 더욱 친밀감을 느끼게 된다. 이 예시에 대하여 직설적인 예시를 든다면, 한 학생은 학교와 미술학원을 오가며 열심히 일하고 남는 시간에도 성적 관리와 그림 공부에 매달리지만, 나머지는 틈틈이 번화가에 가서 같이 맛있는 식사도 하고 카페에서 수다도 떨며 노래방이나 당구장, 볼링장 등에 가서 함께 시간을 보내며 친분을 다지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 다수에게는 아무런 악의가 없다. 한 학생을 따돌리려는 마음도 없고 오히려 그 학생을 칭찬하고 모범생으로 우상화해준다. 하지만 그 한 학생의 입장에서는 노력할수록 고립되어감을 느낄 것이다.


이론적으로만 보면 위 예시의 한 학생은 잘못한 것이 없다. 또 이 예시를 보고 그 학생은 노력에 합당한 입시 결과를 받고 수준에 맞는 새로운 친구들을 얻게 될 것이니 문제될 것이 없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배경이 학교의 학생이 아닌 회사의 사원이라면 어떨까. 더 나은 회사로 이직하면 된다고 말할 것인가? 그렇다면 국가를 운영하는 정치인이라면 어떨까? 더 좋은 정지 환경을 가진 나라로 이민이라도 가야 할까?


본론으로 돌아와서, 호동 왕자에게서 배우고 적용할 점은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조직에서 혼자 노력하여 유능해짐으로써 전제와 구별되어 섞일 수 없는 개인이 된다면 결과적으로 노력이 자신을 해치는 칼이 될 것이다. 자신을 죽이는 성실은 좋은 것이 아니다. 노력이 왜 문제냐는 생각은 경쟁을 강요하는 이 시대의 결과물일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위대한 인물로 손꼽히는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을 보더라도 그들은 혼자 잘나서 혼자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개인의 유능화가 아닌 조직의 유능화이고, 대중적인 표현으로 말하자면 상향평준화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거꾸로 이것을 호동에게 적용한다면 맞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오래전에 살았던 사람들을 평가하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이 적용하여 배우기 위함이다. 여기에서 주장한 내용이 아니더라도 호동의 일화를 보고 다른 자신만의 적용할 점을 찾았다면 그걸로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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