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은 타임지 선정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순수 철학자로서는 유일하게 선정 된 철학자입니다.
신해철씨는 과거 비트겐슈타인이라는 밴드로 활동하기도 했고, 방송에서 보인 유병재씨 방에 비트겐슈타인 사진이 붙어있기도 하며 진중권 씨는 고양이의 이름을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줄여서 루비로 지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이 아직은 생소하지만 특이한 일생과 철학으로 울림을 주는 철학자인 것은 분명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이 이렇게 존경과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철학과 함께 그의 극적인 생애에서도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비트겐슈타인 가문은 요즘의 삼성에 비교될 만큼 오스트리아 내에서 손꼽히는 부잣집이었습니다. 넷째 아들로 태어난 비트겐슈타인은 현재의 명성과 다르게 평범한 어린시절을 보냈습니다. 공부로 두각을 나타내지도 못했고 당시 세계적 피아니스트였던 형, 미술에 재능이 있던 누나에 비해 특별한 재능을 보이지 못한 채 유년기를 보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부잣집 아들로 명문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도 있었지만, 공학에 흥미를 느끼고 아버지의 사업과 관련이 깊은 공학을 배우기 위해 김나지움에 진학합니다. 덕분에 히틀러와 같은 학교를 진학해 같이 찍은 단체 사진이 남아 있을 정도로 근거리에서 학창 시절을 보냅니다. 이후 유대인인 비트겐슈타인과 홀로코스트의 장본인인 히틀러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유명해지게 됩니다.
김나지움 진학 후 공학도의 길을 가게 된 비트겐슈타인은, 공학을 공부함 공학의 기초인 수학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고 수학을 공부하다가 문득 "수학의 옳음을 증명해주는 기초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수학의 기초를 찾는 과정에서 그 분야의 권위자이자 20세기 가장 유명한 철학자들인 러셀과 프레게 를 알게 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러셀을 직접 찾아갑니다. 자신이 철학을 할만한 인재인지, 혹은 다시 공학자의 길을 가야할지 판단하기 위해 비트겐슈타인은 러셀에게 자신이 철학을 할 만한 인재인지 판단해 달라고 합니다. 러셀은 판단을 위해 비트겐슈타인에게 철학적 주제에 대한 글을 써오게 했습니다. 그 글을 읽은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에게 매료되어 '자네는 철학을 하지 않으면 안되네' 라고 말합니다. 러셀은 이후 그 당시 비트겐슈타인을 "전형적인 천재의 모습"이었다고 회상합니다.
러셀과 케임브리지 생활 몇 년 후, 비트겐슈타인은 오스트리아 군대에 자원 입대를 하게 됩니다. 그 와중에 집필한 것이 생전 유일하게 완성한 저작인 '논리 철학 논고' 입니다. 제목만 들어도 읽기 쉽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오는 책입니다. 출간 당시에도 러셀을 비롯한 대부분의 철학자, 논리학자들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논리 철학 논고에 러셀이 쓴 추천사를 본 비트겐슈타인은 러셀이 논리 철학 논고를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했다고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비록 이해한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전쟁에서 돌아온 비트겐슈타인은 논리 철학 논고로 '세상 모든 철학 문제를 끝냈다' 고 선언하며 시골 초등학교의 교사로 생활 합니다. 그 시기에 아버지가 돌아가셔 막대한 유산이 주어지지만 모두 남매들에게 나누어주고 자신은 시골에서 검소한 생활을 합니다. 초등학교 교사, 건축가 등 이런 저런 일을 전전하던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저작 논리철학논고가 완벽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다시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재벌의 아들로 태어나 유산을 상속받는 풍족한 생활도, 케임브리지 대학에서의 안정된 생활도 마다하고 철학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몰두하며 살았습니다. 마지막 유작인 철학적 탐구를 집필하던 중 1951년 62세이 나이로 유언으로 ' 사람들에게 나는 멋진 삶을 살았다고 전해주시오' 라는 말을 남기고 사망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인생은 간략히 설명했지만, 전기를 읽어 보는 것도 추천하고 싶습니다. 꽤 두꺼운 책이었는데도 지루하지 않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사상에 대해서는 사실 해석이 엇갈리기도 하고, 어렵기로 유명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용어의 난해함을 피해 간단하게 설명하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는 철학이기도 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논고를 집필하고 '세상 모든 철학 문제를 끝냈다' 라고 선언 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당시 철학은 '존재란 무엇인가' '수는 실재하는가' 등의 문제가 심각한 화두였습니다. 그런데 그건 답이 나올 수 없는, 의미 없는 토의라는 것이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유명한 말 중 '말 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해야 한다.' 가 있습니다. 그 말은 즉 우리는 실체를 표상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말 할 수 있지만, 그 이외의 것들에 대해서는 말하는 것이 의미 없다는 말인데요. 예를 들어 의자를 지칭하는 건 의미가 있지만, 존재, 수와 같이 명확한 대응을 현실에서 찾을 수 없는 말들은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수라는 단어 자체가 의미 없는 것은 아닙니다. 1은 수이다. 사람은 존재한다. 는 식으로는 쓰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되는 부분은 심층 문법이라는 개념을 통해 드러납니다. 전기 철학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문법을 표층 문법과 심층 문법으로 구분합니다. 표층 문법은 흔히 쓰는 문법이라는 단어의 의미 그대로를 뜻하고 심층 문법은 문장이 실제로 의미를 가지기 위해 지켜야 하는 문법 사항을 뜻 합니다.'수는 실재하는가' 라는 표현은 표층 문법은 맞기 때문에 답이 있는 문제인 마냥 사람들을 현혹하지만 실제로 심층 문법에서의 오류가 있기 때문에 성립하지 않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즉, 심층 문법상 '실재' 라는 단어는, 명확한 대응이 현실에 있는 단어에 성립하는 동사이므로 수와는 맞지 않는 표현이며 결국 '수는 실재하는가'는 의미 없는 문장이 되는 것입니다.
위와 같은 맥락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모든 철학 문제를 끝내고 철학을 그만 둔 것입니다.
후기 철학에서는 전기 철학과 주제는 같지만, 아예 다른 방식으로 논의를 전개합니다. 후기 철학에서 가장 큰 변화는 '언어의 사용'에 주목한 것입니다. 전기 철학에서는 무의미하다고 규정했던 많은 사례들이 우리의 의사소통 상에서 쓰임을 가진다면, 그것이 언어로서의 제 역할이라는 정 반대되는 주장을 합니다.
후기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 중 하나는 '가족 유사성' 입니다. 가족 유사성은 언어의 뜻은 고정 된 것이 아니라 가족 마다 구성원의 생김이 모두 다르지만 공통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듯이 단어 역시 막연한 특성을 공유할 뿐 고정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동시에 그렇게 상실된 언어의 의미는 비트겐슈타인이 언어 게임이라고 칭한 언어의 실제 사용 속에서 얻어지는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조금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모든 철학 문제가 해결 됬다.'에서 '모든 철학 문제가 해결 되지는 않았지만 언어에 대해 이해 하게 되었다'는 상식적인 결론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후 언어철학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심리학에서도 비트겐슈타인의 가족 유사성을 통해 심리학 개념을 설명하기도 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사상은 논리실증주의를 비롯한 철학계 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논고>를 집필한 후 '모든 철학 문제를 끝냈다' 라고 말했습니다. 비록 자신도 다시 철학계에 복귀하였지만 모든 철학 문제를 끝냈다는 비트겐슈타인의 발언은 그것이 굉장히 무의미해 보이는 철학의 많은 문제들에 대해 어필하는 바가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여전히 회자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여전히 철학에서는 비트겐슈타인이 무의미하다고 할만한 주제들이 많이 다뤄집니다. 비록 후기 철학에 들어서며, 기존의 철학 문제를 무의미하다고 할 논거가 없어지기는 했지만, 모든 철학 문제가 무의미하다는 말이 파급력을 가진건 많은 이들이 공감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 문제를 다루는 데에 있어서 그 문제가 어떤 의의가 있는지, 무엇을 위한 연구인지 한 번 더 생각해보도록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