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

by 김동휘

10년 만에 A를 만났다. 만나려고 만난 것은 아니고, 출장 차 찾았던 뉴욕의 공항에서 말 그대로 우연치 않게 만난 것이다. 한국에서도 보기 힘든 사람을 미국에서 만나니 괜히 좀 더 반갑게 느껴졌던 것은 나뿐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아마 A의 인생에서 내 존재감은 그다지 크지 않을 거다. 어쩌면 A는 나를 불편하게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때 A는 타지에서 만난 익숙했던 얼굴이 주는 반가움의 증폭효과 때문인지 나를 보고 먼저 걸어와 말을 걸었다.


대외적으로 나는 A를 싫어했다. 여러 지인이 모인 자리에서 A의 욕을 한 적도 몇 번 있었다. 속으로는 조금 더 복잡한 감정이 오갔다. 나와는 꽤나 다른 방식으로 사는 A가 어떤 식으로든 망해서 A의 방식이 틀렸고 내가 잘 살고 있는 것이라고 확신하고 싶은 마음, 내가 선망하면서도 거리를 두던 것들을 거리낌 없이 낚아채는 모습에 대한 어쩔 수 없는 부러움, 그리고 조금 생뚱맞고 모순되는지도 모르겠지만 어린아이 같이 복잡한 생각 없이 사는 듯 보이는 A의 영혼(?)이 꺾이지 않고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


하지만 그런 것들은 모두 그 당시에 가졌던 감정일 뿐이고 스치듯 얼굴 한 번 본지도 5년은 훨씬 넘은 지금 나에게 A는 그냥 좀 더 활기찼던 때를 떠올리게 해주는 흔한 동창생 같은 사람으로 느껴졌다.


A는 그 당시 내가 호감을 가지고 있던 여자와 사귀었다. 그가 여자를 알게 된 것보다 내가 호감을 가진 것이 먼저였고 그 사실을 A도 알고 있었으니 나는 대외적으로 어느정도 A를 비난할 권리를 얻게 된 셈이었다. 지금 와서는 그 일을 떠올릴 때 어떤 감정적 동요도 일어나지 않고 아쉬울 만큼 무감각하게 느껴지지만 어쨌든 A가 실로 오랜만에 나에게 말을 걸었을 때 그때의 관성 때문인지, 유치하게 우위를 점해보려는 생각에서인지 나는 자연스럽게 A를 반가워하면서도 비난조의 차가운 말이 새어나가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A는 여전히 돈을 쓸 줄 아는 듯했다. 그 당시 돈도 안 버는 대학생임에도 BMW를 몰고 다녔고 해외 여행도 꽤 자주 다녔으니까. 간단한 인사를 나누자마자 A는 나를 이끌고 생소한 외국 항공사 라운지에 갔다. 그러고는 카운터에서 뭐라고 말을 하더니 나를 불렀다. 뒤에서 보기로는 지갑을 꺼내 얼마간 추가로 결제를 한 것 같기도 했다.


"나는 한국이 안 맞아. 외국이 편해. 미국에는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


라운지의 의자에 앉아 A가 말했다. 내가 생각해도 그럴 것 같았다. A는 한국에서는 확실히 욕 먹을 수 밖에 없는 캐릭터였다. 미국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냥 미국에서 사는 것이 A를 위한 길일 수도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고들 하지만 도망치는 것과 자신에게 잘 맞는 걸 찾는 것은 사실 그냥 어떻게 말하느냐의 차이일 뿐인지도 모른다.


"결혼은 했어?"


"올해 할 거 같아."


더 자세히 물어봤다가는 미국에서 열릴 결혼식에 어색한 동기를 초대 하기도 애매하고 받은 초대를 거절하기도 애매한 불편한 상황이 생길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나는 말을 돌렸다.


"M은 다시 본 적 없지?"


급하게 말을 돌려서인지 머릿속에 계속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입 밖으로 내진 않으려 했던 이름이 튀어나와버렸다. M은 대학생 때 내가 좋아했고, A가 만났던 여자였다. A와 M은 한 달이 좀 넘게 만나다가 헤어졌고 그 후로 나는 A와도 M과도 따로 만나는 일은 없었다.


"한 번씩 봐. 한국에 있을 때. 올해는 본 적 없는데."


"뭐하러?"


A는 대답 대신 의미를 알 수 없는 아마도 의도된 듯한 무표정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 눈빛을 받으며 생각해보니 나 스스로가 5년이 넘게 지난 일을 마음에 품고 남의 개인사를 캐려하는 음산한 인간처럼 느껴졌다. 동시에 질문에 대한 답도 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데이트. 헤어졌어도 서로 상황만 맞는다면 언제든 다시 만나서 밥도 먹고 호텔도 가는 그런 일. A에게 그런 식의 이별 후 재회는 전혀 이상하지 않다. 다만 내가 알던 M의 이미지와는 조금 매칭되지 않을 뿐이다. 결론이 그렇게 나니, 완전히 사라진 줄 알았던 예전의 질투 같은 감정의 불씨가 조금 살아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A와 나는 같은 한국행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직 출발까지는 시간이 꽤 남은 상태였다. 타국의 새벽 공항에서 달리 할 일도 없던 우리는 어느새 앞에 놓여 있던 위스키를 꽤 많이 마시게 됐다.


"너는 구라를 너무 많이 쳐. 그게 니 문제야. 그냥 너대로 살아도 뭐 아쉬울 거 없잖아? 괜히 양심에 찔릴 일 많이 만들어 놓으면 사는 게 피곤해진다. 나중에 업보로 돌아올 수도 있어."


"그럼 너는 그때 클럽에서 처음 본 여자한테 뒤돌려차기한 것도 어디 가서 솔직하게 다 말하고 다니는 거지?"


나는 할 말이 없어졌다. A는 예전부터 항상 이런 식이었다.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위선적인 설교를 하거나 쿨한척 하며 얼버무리려할 때 가장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주제를 대놓고 꺼내왔다. 나는 A를 가르치거나 교화하고자 그런 말을 꺼낸 것은 아니었다. 그저 내가 평소에 가지고 사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말로 나온 것일 뿐이었다. A가 나의 위선을 지적하는 것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나 스스로도 자신의 위선을 알고 있고 그럼에도 결국은 이 세상과 발맞춰 살아가기 위해서는 위선이 필요할 때가 있다는 생각으로 위선을 쌓아가고 있을 뿐이었으니까. 아마도 A가 한국 사회와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 모든 위선을 폭로해 버리려는 태도일 것이다. 내가 할 말이 없어진 것은 그 말의 내용 때문이라기 보다는 그 말에 담긴 지나치게 방어적인 A의 태도 때문이라고 봐야할 것 같다.


"그렇진 않지. 그래도 말을 안 하는 거랑, 나서서 구라를 치는 건 또 다르지. 너는 아예 없는 말을 지어내잖아."


나는 이 말을 하며 M을 떠올렸다. 나는 그 당시 A와도 가까운 사이였고 M에게 관심이 많았던 만큼, A가 M에게 그 당시 M이 좋아하던 래퍼와 친분이 있다는 사소한 거짓말을 했다는 것부터 그 당시 A는 이미 사실상 사귄다고 말할만한 여자가 있다는 걸 숨긴 것을 알고 있었다.


"그건 그냥 니가 소심한거지. 니가 그러니까 M이랑도 안 된거야."


"너는 그러다가 한 번 제대로 걸릴 것 같아. 내가 볼 땐."


"걸리면 뭐? 니가 잘 모르니까 그런 소리를 하는데, M만 봐도, 걔도 다 알아. 근데 지금도 잘 지내잖아."


이미 시간은 새벽 2시가 넘어 있었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출발하기 전에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 미국 방문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출장 스케줄 사이사이 나름대로의 관광 계획을 빼곡히 짜넣었었고 그 덕에 한국행 비행기를 기다리는 지금 몸에는 누적된 피로가 꽤나 쌓여 있었다. 거기에 도수가 어떻게 되는지도 모를 위스키를 편안한 라운지 의자에 앉아서 마시다보니 나는 A의 말을 들으면서 감기는 눈을 붙들고 있기 위해 꽤나 노력해야 했다. 그럼에도 어느새 눈이 감기는 나 자신을 의식할 수 있었고 그런 비몽사몽의 와중에 A의 목소리가 꿈인지 실제인지 구분이 안가는 몽롱한 형태로 들려왔다.


"거짓말을 좀 해야 더 재밌는 거 아니야? 아니면 뭐 누가 누가 더 나약한지, 누가 누가 더 초라한지 대결이라도 할까? 거짓말이 차라리 예의야. 솔직하려고 해봤자 머리만 아프고 듣는 사람도 부담스러워. 거짓말인지 진실인지 그냥 신경도 쓰지마. 그냥 되는대로 말 해. 그 순간에는 그게 진실보다 더 진실된 말일지도 모르지. 어차피 다 거짓말이고. 다 환상이야. 근데 그거라도 없으면 무슨 재미로 살아? 아니, 애초에 살 수는 있나? 내가 양심이 없나? 아니 양심에 찔려도 하는 거야. 그래야 인생이 좀 살 만 한게 되니까. 그게 내 책임이니까.


제대로 된 환상. 빠져서 죽어도 괜찮을 것 같은 환상. 아무리 발버둥쳐도 세상의 한 쪽 면 밖에 못 보는 진실보다 더 인생에 가까운 환상. 그게 거짓말일까? 어쩌면 그 거짓말이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랑 오히려 좀 더 비슷한거 아닐까? 진짜 기만은 우리가 진실이라 말하는 편협한 시야로 걸러진 초라하고 빛바랜 조각 같은 것 아닐까?


내가 거짓말에 거리낌이 없어질수록, 갖은 환상과 희망에 내 모든 것을 던질수록 세상은 나를 더 사랑해줬어. 그래. M도 마찬가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