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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이르 Jul 14. 2018

20개월 딸과 아빠의 스위스 여행

<8> 느림보 열차 '빙하특급(Glacier Express)'

10회 분량으로 20개월 딸과 아빠가 떠난 스위스 여행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번 스위스 여행은 지난해 12월 9일부터 17일까지 루체른, 베른, 체르마트, 생모리츠, 취리히를 둘러본 8박9일 여정입니다. 딸과 둘이서만 여행을 떠난 ‘용자’ 아빠는 혼행(혼자여행)을 즐기며 전세계 44개국을 다녀온 자칭 중수 여행가입니다. 이번 여행을 통해 딸과 관계가 더욱 돈독해진 긍정적 효과와 더불어 엄마가 이제 안심하고 딸을 아빠에게 맡겨두고 주말에 외출해버리는 ‘주말 독박육아’의 부정적 영향이 모두 나타났습니다. 10년 전 ‘혼행’을 줄기차게 다닐 당시 혼행이 대중화될것이라 예측 못 했는데 앞으로 10년 뒤에는 아빠와 자녀만 떠나는 여행이 혼행처럼 익숙해 질 날이 올 것이라 생각하며 여행기를 시작합니다.

빙하특급 열차는 천장 일부가 유리창으로 만들어져 스위스의 멋진 자연을 즐길 수 있다.


체르마트에서 맞이하는 마지막 아침이었다. 전날 흐린 날씨로 인해 일출 감상에 실패한지라 오늘 일출을 다시 도전할 지 살짝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마테호른이 보이는 푸리 마을까지 20~30분 가야 하는 데다 오전 8시 52분 기차를 놓치면 안 돼 일출을 포기했다. 눈은 내리지 않지만 하늘이 비교적 흐려 일출 감상 확률은 그리 높지 않았을 것 같았다. 
오늘의 여정은 스위스에서 가장 유명한 열차관광 코스 중 하나인 체르마트~생모리츠간 빙하특급(Glacier Express) 탑승이다. 이 열차는 7개의 골짜기, 291개의 다리, 91개의 터널을 통과해 총 291km를 달리는데 특급이란 명칭에 어울리지 않게 장장 8시간이나 걸린다. 수송의 목적보다는 관광객을 위한 즐길거리인 셈이다. 빙하특급 열차를 타려면 좌석 예약을 미리 해야 하고 예약 없이 탑승하는 건 원칙적으로 금지돼 있다. 나는 한국에서 한달 전에 좌석을 예매했다. 스위스패스를 갖고 있으면 탑승이 무료지만 좌석 예매비는 내야 한다. 예매비가 23스위스프랑(2만7000원)이니 스위스의 비싼 물가를 또 한번 느끼게 된다. 그나마 아기는 무료인 것을 고마워해야 하나. 
20분 가량 일찍 체르마트역에 도착하니 산타클로스처럼 빨갛게 외관을 칠한 빙하특급열차는 벌써 대기 중이다. 좌석에 앉아 ‘20개월 베이비’ 수아를 무릎에 앉혔다. 출발을 기다리며 주변을 둘러보니 승객은 많지 않았다. 좌석의 절반 가량은 텅텅 비어 있었다. 내 옆좌석에 아무도 앉지 않길... 슬쩍 기도해본다.  
기도는 약발이 없었던지 몇 분 채 지나지 않아 한국인 모자가 와서 좌석번호를 확인했다. KTX가족동반석처럼 서로 마주보는 형태로 2개씩 좌석이 구성돼 있는데 한국인 모친은 내 옆자리, 대학생으로 보이는 아들은 그녀의 반대편에 자리를 잡았다. 건너편 좌석들은 통째로 비어있는데 이곳만 북적북적한 풀부킹 상황에 서로 불편하지만 말은 못 꺼낸 채 출발을 기다렸다. 수아도 자리가 불편하고 기다리기 지겨운지 계속 칭얼대고 있는데 출발시간이 10분이 지나도 열차는 당최 떠날 기미가 안 보인다. 
잠시 뒤 승무원이 오더니 “열차 출발이 지연되고 있다며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한다. “왓(What)?” 이곳은 기차시각 철두철미하게 지키고 모든 게 정리정돈 잘 돼 있고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살기 좋은 나라 스위스가 아니었던가. 심지어 JTBC ‘비정상회담’에 출연했던 스위스 출신 외국인은 “스위스 기차는 정시를 어긴 적이 없고 연착되는 건 이탈리아에서 오는 기차들”이라고 자랑까지 했던 그 곳에서 난 벌써 2번째 연착과 고장을 겪고 있었다. 
출발 시간은 어느덧 30분을 훌쩍 넘겼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건너편과 심지어 그 옆쪽 라인 전체 좌석들이 텅텅 비어 있는데 어쩐 일인지 한국인 모자, 20개월 딸과 여행다니는 한국인 부녀, 국적 모를 외국인… 이렇게 다섯은 서로 가족도 아니면서 동반석에 옹기종기 앉아 있고 서로 불편한 시선을 둘 데가 없어 땅을 쳐다보거나 휴대전화를 두드리며 시간을 때우고 있다. 적막이 흐르는 객실에는 한국에서 온 ‘수아’라는 이름의 베이비가 답답해서인지 계속 칭얼대는 소리만 들린다. 
이 난감한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승무원이 다시 오더니 승객들에게 사과의 의미로 무료 음료서비스를 제공하겠다고 한다. 승무원에게 “몇 시쯤 출발하냐”고 다시 물었더니 이 무슨 프로답지 못한 답변이던가. 
“몰라요(I don‘t know.)”

빙하특급에서 수아 베이비와 함께 찰칵

수아를 달래며 하릴없이 창 밖만 바라보고 있자니 한국인 모자의 수근거리는 말이 들려온다. 대략 내용을 조합하자면 “우리가 서로 마주보고 앉아 있으니 불편한 것 같다. 아기데리고 온 아저씨한테 자리를 바꿔달라고 해서 같이 앉아서 갈까”라는 모의였다. 
못 들은체 짐짓 가만히 있으니 아들은 “여러모로 귀찮을 것 같으니 그냥 앉아서 가자”고 한국인 모친의 행동을 저지하고 나선다. 아들이 모의를 주도했다면 이해하겠건만 아기를 키운 경험이 있는 엄마가 도대체 무슨 생각에 이런 말을 꺼낸건지 도통 이해가 안 된다. 
내가 창가 좌석을 예약한 이유는 창 밖의 풍경을 보겠다는 목적도 있지만 20개월 베이비를 통제하기 쉬운 자리이기 때문이었다. 아이와 함께 복도좌석에 앉을 경우 자칫하다간 아이가 복도로 빠져나간다. 다른 승객들에게 불편함을 주는 건 물론 안전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이들 모자의 모의는 실행되지 않아 서로 얼굴 붉힐 일은 없었지만 내심 불쾌한 기분은 지울 수 없었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보다는 본인들이 편하게 가겠다는 의도에서 나온 계획이 아니던가. 둘이 같이 앉고 싶다면 차라리 텅텅 비어 있는 건너편 좌석으로 옮겨가면 될 것을…


빙하특급은 1시간을 지난 뒤에야 드디어 출발했다. 자리 바꾸기 모의를 꾸몄던 한국인 모자는 1시간 정도 탑승한 뒤 비스프(Visp)역에서 내렸다. 시골장터마냥 북적거렸던 동반석에도 드디어 봄날이 왔다. 한국인 모자가 떠난 자리에 앉은 승객은 없었고 국적 불명의 외국인과 나는 활동공간이 넓어진 덕에 미소를 되찾을 수 있었다. 
빙하특급 열차는 천장의 일부분도 유리창으로 구성돼 시야가 확 트였다. 천장 유리 사이로 청명한 하늘과 설경들이 펼쳐지니 그야 말로 장관이었다. 빙하특급이 오랜 기간 관광객들에게 사랑 받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객실 여기저기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져 나왔다.

빙하특급의 주요 고객들은 유럽의 시니어계층. 와인을 마시며 풍경을 즐기고 있다.

시간은 어느덧 오후 1시를 지나 점심 시간을 넘어섰다. 우리돈 3~4만원이면 객실 서비스를 받으며 식사를 할 수 있지만 가격대비 맛이 너무 떨어진다는 한국 블로거들의 평을 보고 우리는 점심식사를 미리 준비해 왔다. 빵과 우유, 스낵을 먹으며 기차여행을 즐기고 있자니 수아는 하품을 크게 하며 낮잠에 빠져 들었다. 
기차가 연착한 탓에 해가 완전히 저문 뒤인 오후 5시가 넘어 종착역인 생모리츠에 도작했다. 생모리츠 역에서 숙소까지는 걸어서 10분이 채 안 걸린다. 하지만 숙소가 언덕에 위치한 데다 눈길이어서 무료 셔틀을 요청했다. 기차가 도착하기 전 호텔 리셉션에 전화를 해 도착 예정시간이 변경됐다는 점을 알리고 셔틀을 기다렸다. 기차 역에 내려 호텔 셔틀을 기다리고 있자니 웬 택시기사가 나에게 말을 건다 
“호텔 발트하우스(Hotel Waldhaus)?”
맞다고 고개를 끄덕이니 타라고 한다. 내가 호텔 셔틀을 기다린다고 하니 택시 기사는 셔틀이 못 와서 자신이 태우러 왔다고 말한다. 짐을 싣고 택시를 탔는데 한참을 달린다. 걸어서 10분 거리인데 이렇게 멀리가 없는데… 택시 기사에게 “호텔 발트하우스 암 제에(Am See)?로 가는 것 맞냐”고 되물으니 기사가 깜짝 놀라며 “노(No)”라고 답을 한다. 도대체 무엇이 꼬인걸까. <9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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