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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이르 Jul 28. 2018

20개월 딸과 아빠의 스위스 여행

<10> '아듀' 비내리는 취리히

10회 분량으로 20개월 딸과 아빠가 떠난 스위스 여행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번 스위스 여행은 지난해 12월 9일부터 17일까지 루체른, 베른, 체르마트, 생모리츠, 취리히를 둘러본 8박9일 여정입니다. 딸과 둘이서만 여행을 떠난 ‘용자’ 아빠는 혼행(혼자여행)을 즐기며 전세계 44개국을 다녀온 자칭 중수 여행가입니다. 이번 여행을 통해 딸과 관계가 더욱 돈독해진 긍정적 효과와 더불어 엄마가 이제 안심하고 딸을 아빠에게 맡겨두고 주말에 외출해버리는 ‘주말 독박육아’의 부정적 영향이 모두 나타났습니다. 10년 전 ‘혼행’을 줄기차게 다닐 당시 혼행이 대중화될것이라 예측 못 했는데 앞으로 10년 뒤에는 아빠와 자녀만 떠나는 여행이 혼행처럼 익숙해 질 날이 올 것이라 생각하며 여행기를 시작합니다.

취리히의 상징인 리마트 강과 그로스뮌스터 교회


취리히는 비가 내리고 있다. 일주일 전 스위스에 도착했을 때에도 비가 내렸는데 떠나는 날에도 비가 내린다. 여유롭게 취리히 호수를 한 바퀴 돌면서 스위스 여행을 마치려고 했건만 날씨가 비협조적이라고 할까. 
현재 시간 오후 1시 30분. 항공기 탑승까지는 8시간이나 남았다. 취리히 도심에서 공항까지는 직통열차로 9분이면 도착한다. 오후 6시에만 출발해도 충분한 상황이다. 바로 공항으로 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일러 비가 그칠 때까지 기다려보기로 한다. 무거운 캐리어를 락커에 보관해야 이동이 편하기에 락커를 찾아 나섰다. 
취리히역은 생각보다 복잡한 구조였다. 열차에서 내린 뒤 다른 승객들 다수가 움직이는 쪽을 따라 지하로 내려갔는데 이게 치명적 실수였다. 외부로 나가는 엘리베이터를 찾아 1층으로 나갔지만 풍경은 썰렁하기만 하다. 기차역의 정문을 찾아야 하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질 않는다. 다시 지하층으로 내려갔다. 이곳에서 기차역 외부로 나가는 출구는 아까 나갔던 곳 밖에 없었다. 결국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올라간 뒤 왼손엔 캐리어 오른손엔 유모차를 끌고 한참을 가니 그제서야 열차역 정문이 보인다. 애초에 열차에서 내린 뒤 지하로 가지 않고 지상으로 쭉 이동했으면 플랫폼 끝에 기차역 정문이 있었는데 지하로 내려가면서 기차역 정문 반대편 쪽으로 가버린 것이다. 캐리어와 유모차를 양손에 끌고 있는 지라 시행착오를 하는 건 상당히 고된 일이다.  
기차역 정문에서 직원에게 락커 위치를 물으니 내 캐리어를 흘깃 보더니 락커에 들어갈 사이즈가 아니라고 한다. 기차역 한쪽 끝에 짐보관소가 있으니 거기에 맡기라고 조언한다. 다시 왼손엔 캐리어 오른손엔 유모차를 끌고 짐보관소를 찾았다. 캐리어는 눈 쌓인 로이커바트 언덕길에서 철퍽 넘어지면서 손잡이의 길이 조절 부위가 망가진 상황. 한손으로 유모차를 끌기도 벅찬데 캐리어의 손잡이도 어정쩡한 상태에서 늘리지도 줄이지도 못 하게 돼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그야말로 ‘하드캐리’한 상황에서 짐보관소는 구세주였다. 캐리어가 손에서 떠나고 해방되자 발목을 채웠던 쇠사슬이라도 풀린 듯 자유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자유를 만끽하며 기차역을 나서니 비는 여전히 주룩주룩 내리고 있다. 인근 카페에서 음료라도 마실 생각에 우의를 걸치고 우천용 커버를 씌운 유모차를 끌고 길을 나섰다. 조금 걷다보니 비가 점점 그치기 시작한다. 이 상태면 취리히 호수까지 걷는 것도 전혀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호수 쪽으로 걷다 보니 교과서에 등장했던 종교개혁가 츠빙글리가 목회했다는 ‘그로스뮌스터 교회’의 자태가 눈에 들어온다. 교회에 입장하니 비를 피하러 온 관광객들이 적지 않았다. 

벨뷰 광장은 스케이트장으로 꾸며져 아이들의 놀이터가 됐다    

교회에서 휴식을 취하고 나오니 비가 완전히 그쳤다. 취리히 호수는 바로 눈앞이다. 호수 근처 벨뷰(Bellevue) 광장에는 스케이트장과 벼룩시장이 어우러져 사람들이 북적댔다. 케밥, 햄버거, 나시고렝 등 각국의 음식들을 판매하는 간이음식점은 그야말로 인기 폭발이었다. 나는 이미 기차에서 즉석 전투식량을 해치운 터라 음식을 사는 대신 몸을 데울 음료를 택했다. 바로 독일에선 글뤼바인(Gluhwein), 프랑스에선 벵쇼(Vin Chaud)라 부르는 따뜻한 와인이다. 비가 내린 터라 날이 쌀쌀했는데 글뤼바인이 목에 들어가니 따스함이 느껴졌다. 호수를 유유자적 거닐다 저녁 식사를 해결하기 위해 구시가지인 니더도르프(Niederdorf) 쪽으로 이동했다. 스위스에서 맞는 최후의 만찬은 치즈퐁듀였다. 원래 느끼한 걸 좋아하진 않지만 스위스에 왔으니 느끼하더라도 본토의 맛을 즐겨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치즈퐁듀 레스토랑에서 치즈는 외면한 채 빵만 즐기는 수아


레스토랑은 사전에 점 찍어 둔 곳이 있었다. TV 먹방프로그램 ‘원나잇푸드트립’에 나왔던 장소인데 이미 수많은 한국 블로거들이 언급한 곳이다. 4시가 다 돼서인지 대기손님은 없었다. 레스토랑에 들어오니 식탁은 거의 꽉 찬 상태. 종업원이 “How many people(몇 명이냐)”고 묻길래 “베이비와 나. 두 명”이라고 답했다. 종업원이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다시 “You and your wife and baby(너와 아내, 아기)”라고 되묻는다. 내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기와 나 뿐”이라고 했더니 어깨를 으쓱하며 2인석 자리로 안내한다. 아기와 함께 다니니 당연히 엄마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비가 내려 쌀쌀해진 날에 몸을 달궈준 글루바인

치즈퐁듀를 주문한 뒤 드디어 먹방을 시작한다. 평소 치즈를 좋아했던 수아는 웬일인지 치즈퐁듀는 입에도 대지 않았다. 대신 빵만 열심히 먹어댄다. 이곳은 관광객이 많이 방문해서인지 심하게 짜지도 아주 느끼하지도 않았다. ‘스위스의 치즈퐁듀가 한국인 입맛에는 너무나 짜다’는 악평은 너무나 많이 들었던지라 이곳의 적당한 나트륨 조절에 감사하다고 해야 하나. 냄비에 붙은 치즈까지 박박 긁어먹을 정도로 배를 채운 뒤 레스토랑을 나섰다. 근처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거리에서 기념품과 선물을 구매한 뒤 캐리어를 회수하고 공항으로 출발했다. 
공항까지 무사히 도착해 20개월 수아와 아빠의 스위스 여행기는 큰 어려움 없이 마치는 듯 했다. 출발 전 가장 걱정했던 것은 ‘아기가 아프다거나 엄마를 심하게 찾는다거나 밥을 잘 못 먹거나 잠을 잘 못 자지 않을까’였다. 하지만 이번 여행내내 이런 일들은 벌어지지 않았다. 수아는 유럽에서 태어난 것처럼 크로아상을 밥보다 더 좋아했고 내무생활하는 군인보다 더 정확하게 밤 9시면 바로 꿈나라로 빠져 들었다. 또 마테호른의 우아한 자태를 산악인마냥 초롱초롱한 눈으로 감상했고 로이커바트의 온천에서는 웃음소리가 떠나지 않을 정도로 즐거워했다. 
고난할 뻔했던 여정을 잘 마무리 짓는구나 하며 흐뭇한 미소를 지을 무렵 최후의 고비가 찾아왔다. 입국하던 당시에도 그랬지만 이곳 취리히공항은 대체 어떤 이유에서인지 기차역 플랫폼에서 공항 출발층인 4층까지 연결된 엘리베이터가 없다. 도착층인 3층에서 내린 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게 돼 있는데 에스컬레이터를 타려면 수아를 안고 유모차를 접어야 한다. 한손으로 아이를 안고 한손으로 캐리어와 접은 유모차를 잡고 에스컬레이터를 타야 하는데 자칫하다간 캐리어를 놓칠 수 있었다. 아니나다를까 캐리어를 제대로 잡지 못 해 캐리어는 두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게 됐고 유모차를 4층에 둔 채 아이를 안고 재빨리 옆 계단으로 후다닥 내려가서 다시 캐리어를 타고 또 한번 에스컬레이터를 타는 반복 노동을 하게 됐다. 

4층까진 무사히 도착했건만 이제는 수아가 문제였다 한번 유모차 밖을 빠져나오니 유모차를 다시 타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아이가 유모차에 타지 않을 경우 유모차, 캐리어를 동시에 이동할 방법이 없다. 유모차에 억지로 태우려다 실패했고 수아는 공항이 떠나가도록 울어댄다. 울면서 사방을 주시하던 그녀는 돌발행동도 시작했다. 10여 미터 앞에 한 외국인이 포장한 햄버거세트를 들고 있었는데 고소한 냄새를 맡았는지 “맘마, 맘마”하며 외국인에게 돌진하는 것 아니겠는가. 재빨리 뛰어가 붙잡느라 캐리어와 유모차는 한 구석에 지켜보는 이 없이 방치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코리안 베이비의 우렁찬 목소리를 들었는지 인근 대한항공 직원이 뛰어와서 짐을 들어준다. 덕분에 체크인을 무사히 하고 항공기 탑승을 할 수 있었다. 
공항에서부터 이미 골이났던 수아는 항공기 기내에서도 얌전히 있지 않았다. 뽀로로를 보여주며 진정시키고 아기바구니에 눕혔다. 옆 좌석에는 수아 또래의 아기를 동반한 여성이 탑승했는데 아기가 아주 얌전하다. 수아도 스위스로 오는 비행기에선 이처럼 얌전했는데... 

아기 바구니에 누워서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수아

항공기는 장시간 비행을 한 끝에 인천공항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착륙을 위해 아기바구니를 제거하니 수아는 또 울어댄다. 품에 안고 달래니 울음은 그쳤지만 착륙하고 한참 뒤까지 칭얼댄다. 짐을 빼서 나가기가 마땅치 않아 모든 승객이 다 나간 뒤 드디어 기내를 빠져나왔다. 승무원의 인사를 받으며 항공기를 빠져나오니 수아도 안정을 되찾았다. 스위스를 떠나기가 너무 아쉬워서 이렇게 칭얼댄걸까. 공항열차를 타고 집으로 오는 길에 수아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쌔근쌔근 자고 있는 그녀의 머릿속에 앞으로 스위스는 자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어쩌면 아빠의 기억 속에서만 남아 있는 여행일 수도 있다. 그래도 뿌듯함을 느낀다.  
아빠와 딸, 살아가면서 둘만 함께 공유하는 기억이 얼마나 될까. 평생 추억할 수 있는 인상적인 여행을 만들어준 20개월 수아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여행을 격려해준 사람들에게 감사한 인사를 하고 싶다. 그리고 아주 가까운 곳이라도 아빠와 딸 혹은 아들만 가보는 도전을 한번 해보길 이 글을 읽는 평범한 아빠들에게도 권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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