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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이르 Jun 23. 2018

20개월 딸과 아빠의 스위스 여행

<5> 로이커바트의 '설상가상(雪上加霜)'

10회 분량으로 20개월딸과 아빠가 떠난 스위스 여행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번 스위스 여행은 지난해 12월 9일부터 17일까지루체른, 베른, 체르마트,생모리츠, 취리히를 둘러본 8박9일 여정입니다. 딸과 둘이서만 여행을 떠난 ‘용자’ 아빠는 혼행(혼자여행)을 즐기며 전세계 44개국을 다녀온 자칭 중수 여행가입니다. 이번 여행을 통해 딸과 관계가 더욱 돈독해진 긍정적 효과와 더불어 엄마가 이제 안심하고 딸을 아빠에게 맡겨두고주말에 외출해버리는 ‘주말 독박육아’의 부정적 영향이 모두나타났습니다. 10년 전 ‘혼행’을 줄기차게 다닐 당시 혼행이 대중화될 것이라 예측 못 했는데 앞으로 10년뒤에는 아빠와 자녀만 떠나는 여행이 혼행처럼 익숙해 질 날이 올 것이라 생각하며 여행기를 시작합니다.

베른을 떠날 무렵이 되자 날씨가 좋아진다. 이번 목적지는 스위스에서 가장 유명한 온천마을 가운데 하나인 로이커바트(Leukerbad)이다. 소요시간은 2시간 10분 정도로 멀지 않지만 여러 번 갈아타야 하는 과정이 번거롭다. 베른에서 비스프(Visp)까지 1시간 정도 간 이후 비스프에서 기차를 갈아타고 로이크(Leuk)까지 9분 정도 이동한다. 로이크역에 내려서 로이커바트행 버스를 타고 산 중턱 마을로 올라가면 된다. 유모차와 캐리어가 없다면 사실 단순하고 쉬운 코스다.   

하지만 유모차와 캐리어를 끌면서 기차와 버스를 번갈아 환승하는 것이 쉽지 않은 미션으로 느껴진다. 한국에서 여행계획을 짤 당시부터 이런 고민이 있어서 베른에서 숙박을 하고 당일치기로 로이커바트를 다녀올까 생각도 했었다. 이 경우 유모차와 백팩만 메고 다니면 되니 이동하는데 큰 문제가 없다. 하지만 로이커바트와 베른을 오가는 것이 번거로웠다. 게다가 로이커바트는 다음 목적지인 체르마트와 가까운데 굳이 베른으로 돌아갔다가 체르마트로 내려오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서울에서 대전 찍고 부산을 가는데 서울서 대전을 당일치기로 다녀오고 다음날 서울서 부산으로 내려가는 듯한 느낌이랄까. 결정적으로 베른은 스위스의 다른 도시에 비해 숙소 값이 비싸서 굳이 더 묵고 싶지 않았다.   

결국 도전하기로 했다. 유모차와 캐리어를 끌고 기차와 버스 각각 1번씩 환승을 한 뒤 온천마을 로이커바트로 가기로 한 것. 결과적인 얘기지만 이번 여행에서 가장 힘들었던 동시에 가장 만족스러운 아이러니한 날을 보내게 됐다.  

로이커바트에서 비스프까지는 평온하게 이동했다. 수아는 객차에서 생글생글. 비스프에 도착한 뒤 지난 편에 언급했던 청기백기 놀이하듯 유모차와 캐리어를 객차에서 내렸다. 스위스 사람 여럿이 도와주려고 하더라. 친절한 스위스인들~ 환승할 기차를 놓치면 안 되니 재빨리 지하보도를 이용해 옆 플랫폼으로 이동한 뒤 기차를 갈아탔다.   

로이크에 내린 뒤 두리번거리니 로이커바트행 버스가 눈에 들어온다. 원래 기차역 바로 앞에 버스정류장이 있다고 했는데 기차역 끝에 버스가 보이더라. 버스 앞에 서 있는 직원에게 “로이커바트 가냐”고 물어보니 타라고 손짓을 했다.   

버스는 승객이 한 명도 없어 쾌적한 상태인데다 휠체어 공간이 있어 유모차를 세워 놓을 수도 있었다. 5분여가 흘렀는데도 출발하지 않아 둘러보니 여긴 버스정류장이 아니라 차고지였다. 한 덩치하는 버스 운전사가 탑승하더니 길이 구불구불하니 아기는 안고 있으라고 했다. 수아를 유모차에서 꺼내 품에 안았다. 버스는 기차역 앞 정류장에 한번 들러 승객을 가득 태우고 드디어 로이커바트로 출발했다.   

운전기사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조금 가다보니 구불구불 산길을 계속 올라간다. 멀미가 나는지 20개월 베이비 수아도 울음을 터뜨렸다. 간식을 주면서 달랬더니 좀 진정이 됐다. 버스는 30분을 달려 로이커바트 정류장에 도착했다.   

눈에 덮인 휴양도시 로이커바트

유모차를 앞세우고 캐리어를 질질끌면서 버스정류장 대합실을 빠져나오니 거대한 눈밭에 갇힌 휴양 마을이 눈에 들어온다. 도로는 온통 눈으로 덮여 있다. 여기서 숙소인 발리서 알펜테름까지는 도보로 8분 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유모차와 캐리어를 끌고 눈밭을 헤쳐나가는데 걸리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구글맵을 따라가려면 일단 방향을 잡아야 하는데 헤매기 싫어 주변 사람에게 알펜테름 호텔의 위치를 물었다. 이 사람 머리위로 물음표 3개가 회전을 한다. 또 다른 사람에게 물어봤다. 그녀 역시 모르겠다고 한다. 여기 나름 유명한 호텔이라고 하던데…   

운을 믿어본다. 오른쪽으로 이동해 본다. 현지인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어 또한번 물었다. 그는 알펜테름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 그가 가르키는 손끝의 방향은… 운 없는 짐꾼의 기대를 무너뜨리며 내가 진행하는 반대 방향을 정확하게 겨냥하고 있었다. “당케쇤”을 외치며 군대제식에서 훈련병 10명 중 절반은 헤맨다는 “뒤로 돌아가”를 시연해본다.     

체감 시간 10분 정도 이동을 하니 삼거리가 눈에 들어온다. 구글맵을 보면 여기서 왼쪽 길을 따라 언덕으로 올라가야 한다. 하지만 삼거리 일대는 쌓인 눈과 이 눈을 치우는 제설용 트랙터, 그나마 눈이 떨 쌓인 공간을 찾아 이동하는 행인들로 난장판이었다.   

아주 어릴 때 강원도에 살던 시절 본 이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이곳은 유모차 바퀴는 절대 구를 수 없는 눈으로 된 늪(앞으로 ‘눈늪’이라는 신조어로 칭하겠음)이라고 해야 할까. 길모퉁이에 서서 한참을 트랙터만 바라봤다.  

제설작업은 열심히 이뤄지고 있지만 짧은 시간내 끝날 일이 아니었다. 결국 플랜B를 가동하기로 했다. 급조한 플랜B는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법의 응용편이라고 할까.   

1.캐리어를 들고 ‘눈늪’을 피해 뛰면서 삼거리 건너편에 갖다 놓는다.   

2.캐리어를 누가 훔쳐갈까 주시하면서 재빨리 유모차가 있는 위치로 돌아온다.   

3.캐리어를 주시하면서 유모차를 들고 ‘눈늪’을 피해 뛰면서 삼거리 건너편으로 이동한다.   

4.유모차를 밀고 캐리어를 끌면서 아무 일 없는 듯 호텔을 향해 간다.   

평소 체력단련을 든든하게 해 둔 덕에 플랜B를 무사히 마치고 목적지를 향해 갈 수 있었다. 두 번째 난코스는 언덕이었다. 제설작업이 어느 정도는 돼 있었지만 여전히 곳곳에 눈늪이 있다. 게다가 오르막인지라 힘이 몇 배 더 든다. 언덕을 넘어 코너를 돌았다. 이 모퉁이를 돌면 호텔이 떡하니 나타나겠지 생각했는데 호텔이 없다. 사막의 신기루를 보는 경험이랄까.   

구글맵을 다시 쳐다본다. 모퉁이를 하나 더 돌아야 한다. 낑낑대며 밀다보니 캐리어가 눈늪에 빠졌다. 캐리어를 번쩍 들어 옮기다 캐리어가 철퍽거리며 도로에 헤딩을 한다.   

충격이 꽤 컸는지 캐리어 손잡이 부분이 뻑뻑해졌다. 손잡이 버튼을 누르면 손잡이가 캐리어 몸체로 들어가야 하는데 손잡이가 반쯤 빠져나온 상태에서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우리는 이 경우 흔히 “고장났다”라고 말을 하지. 마침 여기가 눈밭이니 이거야말로 정녕 설상가상(雪上加霜)인가.   

18년전 군대 훈련병 시절 ‘완전무장한 뒤 산악행군’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맨몸으로 가도 힘든데 군장에 총까지 짊어지고 오르려니… 군시절의 경험을 되살려 산악행군을 재연해본다.   

유모차를 밀면서 손잡이가 짧아져 끌기 힘들어진 캐리어를 끌면서 언덕 위를 오른다. 지금 이 순간은 힘들어도 결국 피니시라인은 오게 돼 있다. 윤상의 노래 ‘달리기’에도 있지 않던가   

“지겹나요 힘든가요 숨이 턱까지 찼나요... 단 한가지 약속은 틀림없이 끝이 있다는 것~”  

그렇게 훈련병 체험을 끝마치고 드디어 알펜테름에 도착했다. 호텔 직원이 원래 예약한 방이었던 싱글룸 대신 더블룸으로 바꿔줬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아기 동반 효과이던가)   

투숙객이 적으니 호텔에서 인심을 쓴 것으로 봐야할 듯 하다. 호텔은 최대의 장점이 온천을 함께 운영한다는 것이다. 온천 규모도 꽤 크다.   

가볍게 식사를 마친 뒤 온천욕을 준비했다. 대중온천인만큼 수영복 착용이 필수다. 수아에게 전신수영복을 입히려고 하니 진저리를 친다. 면소재인 일상복과 촉감이 달라서 그런가. 수영복을 입지 않겠다고 심하게 울어댄다.   

로이커바트 알펜테름 호텔 앞

잠시 진정을 시키고 수영복 입기에 재도전했지만 그녀는 또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주의를 산만하게 한 뒤 재빨리 다리부터 수영복을 입혔다. 입기 싫다고 또 울어댄다. 잠시 달래주는 척하면서 또 재빨리 두 팔을 수영복에 끼웠다. 이제 지퍼만 올리면 끝인데...   

그녀는 입기 싫다며 팔을 빼려고 한다. 또 달래주는 척하면서 지퍼를 올리려는데 잘 안 잠긴다. 그녀가 팔을 빼려고 하는 위기의 순간 지퍼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수영복을 착용한 이후에도 계속 울어댔지만 여기까지 와서 수영복을 다시 벗길 순 없지 않은가.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착용감에 익숙해졌는지 평온한 상태로 돌아왔다.       

알펜테름 온천이용료는 30프랑(3만3,500원) 가량되지만 투숙객은 50% 할인을 받을 수 있어 15프랑만 내면 된다. 또 7세 미만 아동은 무료다.   

수영복, 타월 등도 유료이지만 수영복은 미리 챙겨왔고 타월은 호텔 객실에 비치돼 있어 투숙객은 돈을 내지 않아도 된다. 무엇보다 편한 점은 호텔 객실에서 수영복과 가운을 걸치고 나와 호텔 지하통로를 통해 온천건물까지 이동할 수 있다는 점이다.(이 호텔 홍보직원해도 될 듯)   

입장권을 사서 온천에 들어왔다. “물 온도가 미지근해서 일본 온천보다 못 하다”는 평도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이날 짐꾼으로서 아주 고생을 한 탓에 온천욕이 아주 상쾌했다.   

캐나다 밴프, 터키 파묵칼레, 헝가리 세체니 온천 등 비슷한 형태의 온천을 많이 가봤지만 이날 고단한 짐꾼의 하루와 결합돼 그런지 만족도는 이곳 로이커바트가 가장 좋았다.   

이용객도 많지 않아 쾌적했고 온천 건물도 상당히 컸다. 따뜻한 물에 들어가니 수아도 아주 즐거워했다. 수아는 목욕탕을 천성적으로 좋아한다. 이미 6개월이 되던 때 아빠와 함께 남탕을 가본 적이 있다.   

온천에서 평온한 표정의 수아

반신욕을 할 때 얼굴 표정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세상을 달관한 어르신이 열탕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표정이라고 할까나.   

야외온천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있어 야외로도 나가봤다. 낮에는 주변의 알프스 산을 보며 온천을 할 수 있지만 겨울이라 해가 일찍 진 탓에 주변 풍광은 볼 수 없었다. 사실 이곳은 주변 풍광을 보며 야외온천을 즐기는 것이 유명하긴했는데...   

야외온천의 거품욕 시설이 있었는데 개인적으로는 짐꾼의 고된 하루를 말끔히 해소해주는 최고의 장비였다.      

온천을 즐기는 수아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할까. 평범한 패키지관광객처럼 편하게 버스를 타고 호텔 앞에 도착한 뒤 온천을 한다면 도저히 느끼지 못할 즐거움이었다.   

또 온천을 하며 연신 생긋생긋 웃고 있는 수아를 보고 있으니 저절로 미소가 떠오른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유용한 아이템 중 하나였던 ‘스마트폰용 방수 커버’의 위력이 이때 발휘됐다.   

즐거운 부녀의 온천욕을 동영상으로 찍은 뒤 아내에게 전송했다. 후일담이지만 아내에게는 더없이 반가운 영상편지였다고 한다. 8일간 육아에서 해방돼 자유시간을 보내고 있던 그녀는 이 동영상을 본 이후 아빠와 딸만 보낸 여행에 대한 걱정이 모두 사라졌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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