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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nghyun Kim Jul 18. 2020

루머의 루머의 루머

지난 일주일 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 그러다가 '루머의 루머의 루머'에 대한 리뷰를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극 중에 등장하는 미국 고등학교의 모습이 내가 살아가는 한국 사회와 닮았기 때문이다.


'루머의 루머의 루머'는 내가 넷플릭스를 통해서 처음으로 접한 컨텐츠이다. 3년 전 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당시만 해도 넷플릭스가 지금처럼 대중적이지 않았다. SNS에서 광고가 뜰 때마다, 이 작품이 빠지지 않던 것으로 봐서는 아마도 넷플릭스에서 자랑하는 메인 컨텐츠였을 것이다. 


나는 단순 스릴러물쯤으로 알고 시작했는데, 지금까지도 내 사고에 큰 영향을 미치는 드라마로 남았다. 컨텐츠는 역시 힘이 쎄다. 밤을 새가면서 몰아보다가, 메시지를 소화하기 위해 한참을 더 생각하며 잠에 들었던 기억이 난다. 

이 글을 쓰기 위해서 다시 보지는 않았다. 나의 생각과 이 드라마가 주는 시사점에 대해서 쓸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의 기억에 의존해 쓰는 것도 그런대로 의미가 있을 것이다.



"Everything affects everything"

이 드라마는 해나 베이커의 죽음을 추적하는 이야기다. 그녀는 자살한다. 그리고 본인이 스스로 생을 마감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들을 카세트 테이프에 녹음해서 남긴다. 그래서 영어 원제는 "13 reasons why"다. 


그녀와 같이 학교 생활을 했던 학우들은 이 카세트 테이프를 청취한다. 카세트 테이프는 그녀가 겪은 사건들, 그녀와 얽힌 인물들, 그리고 그 속에서 혼자 감내해야했던 고통을 고스란히 재구성한다. 마지막에는 "모든 것은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친다"는 말을 남긴다. 


나는 이 문구가 인상적이었다. 그녀가 죽은 이유는 13가지가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미국 고등학교라는 공간적 배경 속에서 형성되는 문화와, 그로 인해 겪었을 심리적 고통과 압박에 그녀는 아마도 "너희 모두 공범이야", "누구도 나를 도와주지 못했어"라는 메시지를 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 문화는 13가지 사건이 일어나도록 묵인해주고, 허용해주고, 나아가 그녀의 문제를 제대로 해결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해나가 다닌 고등학교는 특별하지 않다. 미국 스쿨물에 나오는 전형적인 형태를 띄고 있다. 폭력과 범죄에 노출된 문제아들을 모아놓은 공간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래서 해나와 얽힌 아이들도, 여느 일반적인 미국 고등학생들이다. 파티를 좋아하고, 친구들과 잘 어울리고, 쿨하고 재밌는 아이들. 겉으로 보기에 나쁠 게 전혀 없는 사람들. 학교 내에서 문화적인 권력을 형성하는 주류 집단, 대다수가 학교에서 같이 어울리고 싶어하는, 소위 '인싸'들이다. 그런데 해나의 서사를 따라가다보면 이들은 더 악랄하게 나쁘고, 나쁘고, 덜 나쁜 영향을 끼치며 해나를 죽음으로 몰아간다.  


해나 또한 특별하지 않다. 주위 사람들을 편견없이 친절하게 대할 줄 알며, 웃음이 많아서 미소가 어색하지 않고, 사랑할 줄 알고 사랑받고 싶어하는, 감수성이 예민한 고등학생이다. 전학생 해나는 인기가 많다. 그녀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새로운 관계들은 '순수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그 마음은 이내 금이 가고 부서진다. 해나에게 다가오는 상대들은 같은 마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해나는 인싸들의 문화권력에 동조하지 않는다. 장난으로 둔갑한 폭력에 반항하며, 내키지 않은 관계를 거부하고, 나쁜 기분을 표현한다.


그래서 해나는 누구보다 특별하다. 누구만큼이나 친구와 파티를 좋아함에도 애써 그들과 어울리기 위해, 처음부터 타협하지 않는다. 그럴 때마다 그녀를 피해를 입는다. 인싸들이 퍼트리는 '루머'의 희생양이 되고, 그것은 그녀를 고립시킨다. 끝내 그 고립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을 내려놓았을 때, 뒤따르는 장면은 충격적이다. 


해나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누구를 욕하지도, 괴롭히지도, 때리지도 않는다. 그녀는 그저 남들처럼 친구들과 어울리며, 행복한 추억을 쌓고, 재밌는 학교 생활을 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건 너무나 당연히 이뤄졌어야 할 일이다. 그러나 해나가 경험한 공간은 그런 당연한 일들이 일어나기에는, 그녀를 인간으로 온전히 수용하기에는 너무나 미성숙했다. 


그녀를 위한 안전 장치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나마 남자 주인공 클레이는 다른 아이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그녀를 사랑하지만, 그 역시 미성숙하다. 해나의 아픔을 제대로 들여다보지도, 위로해주면서 살아갈 이유를 제공해주지도 못한다. 오히려 상처를 더한다. 그녀의 죽음을 파헤치며 뒤늦게 "사랑한다"고 고백했을 때는 이미 한참 늦었다. 참 안타까운 장면이다.  


나는 미국 고등학교를 통해 우리 사회의 여러 모습이 떠오른다. 우리 주위에는 순수한 마음으로 친절하게 상대방을 대할 줄 알고, 꿈을 이루고자 악의 없이 살아가는 평범한 해나들이 어디에나 존재한다. 그들은 행복한 삶을 꿈꾸며, 열심히 자신을 가꾸고 노력한다.  


그런데 우리사회 곳곳에서 기득권을 형성하는 '인싸'들은, 그들로 인해 형성되는 '문화 권력'은 과연 해나들의 당연한 삶을 성숙하게 응원해줄 준비가 되었는가? 아니면 "우리와 함께 어울리고 싶으면, 네가 성공하고 싶으면, 적당히 타협하고 동조해"라고 말하는가? 

그 과정에서 잘못이 없는 수많은 해나들이 자신의 불편을 참고 부당을 덮으며, 마음의 크고 작은 스크래치들이 곪아서, 끝내 무너지는 것은 아닌지, 잘 살펴봐야 할 일이다.


"나는 사명감이 부족한 것 같다"며 힘들게 뚫은 언론사의 문을 내 발로 나온 그 순간부터, 나는 기존 권력에 적극적으로 저항할 수 있는 '나의 권력'을 잃었다. 그때는 그저 복잡한 문제들은 뒤로하고 주위 사람들이랑 맛있는 거나 먹고, 재밌는 농담이나 주고 받으면서 단순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그런데, 감정이 풍부하고 감수성이 예민해서, 순수하고 친절해서, 너무나 행복하게 잘 살아가고 싶어서, 그래서 아파하는 사람들을 볼 때면, 자신의 모습을 잃지 않고 생각을 표현하며 희망을 가지는 사람들을 마주할 때면, 이상하게 마음이 쓰인다. 적당히 덮어두고 싶은 문제들을 다시 꺼내서 생각해본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다만,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어. 지금을 잃지 않았으면, 그래서 그대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으면. 타협을 강요받지 않았으면. 가끔 너무 슬프고 우울할 때는, 네 그대로의 삶을 응원해주는 사람들이 있음을 기억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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