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의 미래 1

AI가 대화교육의 튜터가 될 수 있을까?

by 신동일

2024년부터 서울시 초중등학교에서 ‘로봇 튜터’가 도입되어 학생들에게 영어 대화를 가르친다고 보도되었다. 서울시 교육청이 ‘영어 공교육 강화방안’으로 발표한 것이며 영어 사교육비를 경감하려는 취지에서 공교육에 영어학습 프로그램을 지원한다는 기획이었다. 보도 기사를 보면 ‘영어 공부에 대한 동기와 흥미를 유발하기 위한 목적’으로 튜터 로봇이 맞춤형 회화 연습을 하도록 돕는다. ‘음성형 챗봇’ 앱도 도입되며 교사가 수업 시간에 활용할 수도 있지만 학생들이 집에서 혼자 로봇과 영어 말하기를 할 수도 있다.


그렇게 호들갑을 떨던 기사 내용이 민망하고도 안타깝기만 했다. AI는 여전히 대화교육의 튜터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시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은 ‘서울교육 국제화 방안’을 함께 발표하면서 이주 배경 (다문화) 학생의 비율이 높아지고 해외 교류 기회가 확대되는 만큼 세계시민교육에 투자하겠다는 기획도 언급했다. 내국인과 외국 학생들이 함께 공부하는 ‘국제공동수업’을 확대하고 ‘세계시민교육원’을 설치하겠다는 계획도 언급되었다.


과연 조희연 교육감의 야심찬 선언대로 AI가 주도하는 교육이 글로벌 교육을 선도하게끔 유도하고 ‘열린 다문화 시대’까지 도울 수 있을까? 보도 내용으로만 판단해도 로봇 튜터가 등장하는 영어회화 교육은 거창한 세계시민교육, 국제화 정책, 다문화 시대라는 청사진과 어울리지 않는다. 공학적인 기획은 지금까지 인간의 언어활동을 합리성의 원리로 전환시키고 입력, 저장, 출력의 절차에서 정보를 표준적으로 처리하게끔 했다. 로봇까지 등장시키는 대화형 AI까지 계속 방치하다간 대화 기반의 삶과 교육이 엉망이 될 것만 같다.


세상 그 어떤 AI도 여전히 말 차례를 교환하면서, 즉흥적으로 대화의 화제를 바꾸고, 맞장구를 치거나, 말을 겹치지 못한다. 또는 중요한 부분에 억양마저 달리하면서 내용을 추가로 부연하고, 또 어떤 부분에서는 침묵하거나 간략하게만 언급하고 넘어가는 방식으로 대화를 만들 수 없다. AI는 발화의 경로와 가능성을 사전에 모두 프로그램화시켜야 하는데 대화적 맥락과 관계 변수가 너무 다양한 만큼 그만한 입력값을 모두 투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임의적이고 즉흥적인 소통의 변인을 프로그래밍 일부에 반영할 수 있겠지만 예측이 가능해야만 하고 제한적인 수준일 수밖에 없다. 그런 이유 때문에 AI와 대화를 공부하는 학생은 연습을 하면 할수록 인간과의 진짜 대화를 유연하게 감당하지 못하는 역설에 빠질 수 있다.


대화는 둘 이상의 참여자가 의미를 협상하는 말하기 활동이다. 우리는 언어발달의 시작점부터 대화를 배운다. 그리고 의사소통 환경이 위협적이지만 않다면 대화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고 배울 수 있다. 어린 학습자라면 인색하고도 이상하게 대화하는 AI와 일찍 친구가 될 필요는 없으며 자신의 모어나 공간적 자원으로 의미를 자유롭게 협상할 수 있는 인간 화자와의 경험이 더 소중할 것이다.


AI 대화는 한 편에서만 (대부분 인간만이) 주도적으로 대화에 참여한다. AI는 입력된 것으로 출력을 내어주는 하나의 반응 함수에 불과하다. 고객 관리를 돕는 제한된 용도가 아니라 대화를 가르치고 배우는 교육현장에서 AI로 인간 대화자를 대체하겠다는 기술적인 발상은 재고되어야 한다. 어린 학생을 가르치는 교육현장이라면 더욱 신중하게 검토되어야 한다.


AI는 알고리즘 기반 학습을 통해 완벽하게 문법지식을 숙지할 뿐이다. 문법은 대화기술의 필수 조건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로봇까지 동원할 만큼 대화교육에 너무 호들갑이지 않아야 한다. 대화가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속성으로 관리될수록 어린 학습자는 지루하거나 불편하거나 어렵게 느낀다. 멀티미디어 교재와 표준화 시험으로도 부족해서 이제 로봇까지 동원되어야 할 만큼 대화교육에 전념하지 말아야 한다. 대화는 누군가로 살아가는 (다르게 살아가기를 기대하는) 정체성의 표지이다. ‘로봇과 대화를 연습하는 나’는 ‘로봇과 대화하며 살아가는 나’의 삶에 익숙해진다.


우리는 누구나 자연스럽고도 상호작용적인 대화를 온전하게 배워야만 한다. 우리는 참조물이 없더라도 감정을 표현할 수 있고, 침묵과 망설임에 관대하며, 천천히 서로를 존중하며 의미를 협상하는 언어사회화 과정을 경험해야만 한다. 그렇게 대화를 배울 때만 우리는 좋아하는 사람과 침묵 가운데 함께 있을 수도 있다. 여행지에서 한적하게 대화를 나누며 산책을 할 수도 있다. 고민하고 고통을 겪으면서도 차분히 경청하고 말을 건네며 대화를 섞을 수 있다. 우리가 대화를 배우는 이유는 ‘대화를 하는 너와 내’가 되기 위해서라는 걸 잊어선 안 된다.


출처 : 대학지성 In&Out https://www.unipres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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