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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럭저럭 소소 Nov 02. 2020

'윤동주 시집이 든 가방을 들고'를 듣는 아침

바삐 나가려는데 현관 타일 위에 오줌이 흥건하다. 짜증이 확 올라온다. 우리 집 고양이 물루가 또 오줌을 싸놓은 것이다. 화장실도 두 군데나 되고 모래도 깨끗이 갈아주건만 이 자식은 왜 자꾸 여기다 오줌을 한강같이 싸놓는 거야. 속으로 생각한다. 동물이라도 듣는 귀가 있을 테니 밖으로 차마 말을 꺼내지는 못한다. '어디 고양이 고려장이라도 없나? 그런데가 있다면 내 다 버리고 싶다.' 아니면 '저 자식은 언제 죽나? 언제까지 살려나?' 나는 이런 생각이 올라오는 걸 물끄러미 쳐다보며 오줌을 닦는다. 락스를 뿌리고 물휴지로 다시 한번 닦는다.

고양이 물루와 산지 13년이나 됐다. 고양이 연령으로 물루는 80 노인이다. 사람 늙어가는 것과 비슷하게 몰골이 말이 아니다. 털이 빛을 잃고 부스스하며 살이 빠져 그 좋던 풍채도 간데없다. 걸음이 느릿해지고 틈만 나면 누워 지낸다. 성욕은 있으나 몸이 안 따라주는 남자처럼 물루도 높은 데는 올라가고 싶으나 시도했다 떨어지곤 한다. 입맛도 변덕이 심하다. 이가 부실해 먹던 사료엔 입도 안 댄다. 세상엔 없는 것이 없다. 내 문제는 누군가가 질문했던 문제고 그 문제엔 누군가 답을 내놓았다. SNS 보살은 내 문제를 해결할 길을 친절하게 가르쳐준다. 늙어가는 고양이가 입맛을 잃을 때 먹일 수 있는 섭식 사료라는 게 있다는 걸 알았다. 내 곁에 못 먹는 중생이 있다는 건 여간 마음 쓰이는 일이 아니다. 그걸 사줬더니 반짝 입맛이 도는지 허겁지겁 주린 배를 채운다. 안도했다. 그러더니 얼마 못가 그 조차도 안 먹는다.

아무 데나 물컹하고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똥을 싸갈 거야 놓는다. 그것도 하루 몇 번씩이나. 먹는 것도 부실한데 어디서 그런 똥을 만들어내는지. 고양이 특유의 깔끔은 실종된 지 오래다. 고양이들은 뒤처리를 똑 부러지게 한다. 애완동물 키우려는 사람들한테 나는 같은 값이면 고양이를 키우라고 조언하곤 했다. 배변 훈련이나 산책 같은 성가신 일은 안 해도 된다고 말이다. 그런데 물루를 보고 있으면 그런 말은 뭘 모를 때 하는 소리란 걸 절감한다. 애완동물 키우려는 사람한테 요즘이라면 "정말로 신중하게 생각해보고 키우더라도 키우세요. 사람 늙는 것과 똑같아요. 겪기 싫은 존재가 되는 그 때라도 보듬고 갈 자신이 있으면 키우세요."

딸과 그런 물루에 대해 이야기한다. 딸은 길고양이 먹이주기 동호회에서 활동했을 만큼 동물을 좋아하는 애다. 물루도 사실 딸이 아니었다면 인연도 없었을 것이다. 내가 일을 시작하고 집 비울 일이 많을 때 어린 딸의 외로움을 달래려고 데려왔으니까. 딸은 물루가 아무 데나 오줌 싸고 똥 싸면 나한테 은근 미안해하는 것 같다. 마치 의붓자식을 데리고 남의 집 시집살이 간 여자처럼. 물루가 반듯하게 말썽 없이 지내야 주인한테 구박을 덜 받을 텐데, 싶은 마음인가. 오늘은 같이 차를 타고 가면서 최근 정호승 시인의 '윤동주 시집이 든 가방을 들고'라는 시를 봤는데 퍽 공감했다고 한다.

나는 왜 아침 출근길에
구두에 질펀하게 오줌을 싸놓은
강아지도 한 마리 용서하지 못하는가
윤동주 시집이 든 가방을 들고 구두를 신는 순간
새로 갈아 신은 양말에 축축하게
강아지의 오줌이 스며들 때
나는 왜 강아지를 향해
이 개새끼라고 소리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가
개나 사람이나 풀잎이나
생명의 무게는 다 똑같은 것이라고
산에 개를 데려왔다고 시비를 거는 사내와
멱살잡이까지 했던 내가
왜 강아지를 향해 구두를 내던지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가 <후략>

내 말이 딱 그 말이다. '자리이타自利利他'라는 말을 말간 얼굴로 들먹이는 나는 얼마나 모순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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