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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럭저럭 소소 Nov 05. 2020

돈 먹는 하마

프린터기가 멎었다. 평소 한 번도 켜지지 않았던 버튼에 노란불이 들어왔다. 전원 버튼을  꾹 눌렀다. 어? 아예 전원이 켜지지 않는다.


자료를 어떻게  내보내야 할지, 갑갑하다. 시간을 보니  서비스센터 운영 중일 것 같다. 114 안내를 받아 서비스센터에 전화를 하니 대기인원 여섯 명이라며 계속 음악 소리만 들린다. 해결해야 하니 지그시 참고 기다렸다.

낭랑한 목소리로 응대하는 직원, 이렇게 저렇게 해보라는 대로 했다. 결과가 신통찮았다. 결국 가까운 서비스센터를 방문해야 했다.


다음 날 아침 네비에 서비스센터 주소를  찍었다. 집에서 한 4킬로 거리, 지척인데 주변에 가서 한참 헤맸다. 오고 보니 익숙하게 다니던 길로 왔으면 훨씬 가까웠을 곳이다. 네비가 가르쳐 준 길은 에둘러 오는 길이었군.


기사가 점검을 마치고 나더러 테이블에 일단 앉아보라는 거다. 단단히 고장 났나 보다. 메인보드가 고장 났다네. 한 6만 원 정도 수리비가 드는데, 문제는 그걸 바꾼다고 다른 부분이 이상이 안 생기리라는 보장을 못 하겠다는 거다. 얼마 전 헤드를 통째로 교체하느라 8만 원이나 들였다. 그게 아까워서 달리 방법은 없냐고 묻자, 자기 소견으로는 차라리 새 걸로 바꾸는 게 더 낫겠다 한다.


요즘 우리 집 가전제품들은 전부 아프다고 난리다. 압력 전기밥솥 내솥을 갈고 파킹을 교체한 지 얼마 안 됐는데, 하루는 밥이 아예 설었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클 것 같아 밥솥을 버렸다. 금색 표면의 내솥은 빼놨다. 뭐라도 끓이는데 쓰려고. 그런데 그걸 얼마나 써먹을까.


에어컨이, 세탁기가 위태위태하다. 그때그때 필요해 마련한 기기는 불편을 해결해주는 해결사들이었다. 그 해결사들이 태업을 할 때면 가슴이 답답하다. 언젠가 방광이 아파 오줌소태를 겪었을  때처럼. 무거운 걸 번쩍  들다 허리를 삐끗한 것처럼. 그것 없이는 일상이 버벅댄다는 면에서 이 기기들은 이미 내 몸이다. 그것 없이도 살 수는 있겠지. 하지만  상당한 금단의 시간을 견디면서 다른 나를 만들어야 가능하리라. 어떤 신을 믿지 않은 지 오래라고  나는 생각했다. 따져보지 않은 생각이었다. 인간이 만든 관념의 신 대신 테크놀로지라는 신으로 바꿔 탔을 뿐. 그 신은 돈 먹는 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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