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시 세끼 집밥의 시절
심플한 상차림 속에 사랑도 있었고 건강도 있었고
아이러니하게도 먹을 것이 넘치는 세상이 되다 보니 상차림이 더 힘들어졌다. 그것은 온갖 퓨전과 풍족한 외식 문화에 길들여진 요즘 아이들의 화려해진 입맛 탓이기도 하고 너무 잘 먹어서 탈이 난다는 세상에 건강이라는 컨셉에 맞춰 식단을 꾸미는 일이 쉽지만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뜬금없이, 먹을 거 귀하던 시절엔 오히려 식단 걱정은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무엇을 어떻게 먹을 것인지 큰 고민 없이, 그냥 밥, 국, 김치, 장아찌류에 특별한 날 가끔 고깃국, 남들과 비교할 것도 없이 차라리 맘 편하지 않았을까....
그 시절 손쉬운 상차림이 살짝 부럽기까지 하니 스스로도 어이없다. 다양한 요리와 현란한 레시피에 뒤따라가기 벅찬 나는 차라리 예전처럼 먹고사는 일이 단출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어렸을 적 우리네 밥상은 참 단출했다. 된장국에 김치 하나면 끝. 김치 하나로 열두 가지 곡예를 부리듯 부침개며 김칫국이며 찌개며 찜이며 볶음이며 또는 만두소에 볶음밥에 고등어조림에 어디 응용되지 않는 데가 없이 입이 즐거웠다. 간장, 고추장을 소스로 나물 무침에 몇 가지 푸성귀면 충분했다. 지금처럼 피자며 스파게티며 스테이크가 없어도 먹는 즐거움에 손색이 없었다. 물론 당시에는 반찬 투정 꽤나 했지만 말이다.
사실, 많은 가공의 먹거리들이 사람들의 입맛을 바꿔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퓨전이라는 이름 아래 다채로운 음식을 경험하는 건 긍정적이지만, 원 재료의 맛보다는 첨가한 양념이나 소스로 입맛을 현혹시키다 보니 미각을 잃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세상은 바쁘게 돌아가고 심리적, 정신적 쾌와 락을 찾는, 푸드가 아트인 세상인 것이다. 아쉬운 건, 쾌락을 충족시키다 보니 건강에 위협이 가해진다는
것인데.... 오죽하면 '집밥'이라는 고유명사가 생겨났을까도 싶다.
집밥이 단순히 건강한 음식이라는 측면 말고도 함의하는 바는 크다. 집밥은 정성과 사랑이라는 양념과 소스를 필수적으로 첨가하는, 미각만 자극시키는 게 아닌 관계와 관계를 이어주며 마음을 채워주는 음식 외의 수단이며 도구며 소통의 통로였다. 그래서 옛 음식의 정서는 바탕에 사랑과 배려와 나눔을 깔고 있다.
그렇게 나누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훈훈하게 배를 채우던 그 시절을 종종 소환해 오는 음식 몇 가지가 떠오른다. 첫 번째는 여러 가지 나물을 넣고 비벼 먹던 엄마와 외할머니의 비빔밥이다, 집에 있는 온갖 나물이 다 들어가는데 때론 상추와 푸성귀 몇 종류만을 넣기도 했다. 여름날 대전에서 두 시간 거리인 대구에 사시는 외할머니가 오시면 두 모녀는 상추쌈이나 나물 비빔밥을 종종 해 드셨다. 할머니는 딸의 없는 살림이 축날까 하여 엄마가 장 보는 것을 극구 말리시며 보리 비빔밥이 먹고 싶다고 하셨다.
어린 내 눈에도 엄마의 부담을 덜어주려는 할머니의 자식 사랑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어쨌든 된장찌개를 끓이고 커다란 양푼에 상추와 나물, 고추장을 넣고 주걱으로 서걱서걱 비비면 그 많은 양에 나는 늘 입을 쩍 벌리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할머니는 그런 내 모습을 매우 재미있어하셨다. 엄마랑 할머니는 그 많은 비빔밥을 연신 맛있다며 거뜬히 해치우셨다. 그땐 무슨 맛일까 했던 그 맛을 찾아 지금은 나도 커다란 양푼에 서걱서걱 비빈다. 하하호호 웃으시던 두 분 모습은 푸성귀 가득한 보리 비빔밥과 함께 내 가슴에 평화로운 판화로 남아있다.
두 번째는 콩국수다. 요즘은 집에서 콩국수를 할 때 맛과 영양을 배가시키기 위해 갖은 견과를 넣어 최대한 고소하게 콩국물을 내는데 엄마는 단 하나 콩만을 썼던 것 같다. 요리 레시피를 연구할 심적, 경제적 여유가 없는 시절이었으니 비교 선택할 여지조차 없었지만 내게는 최고의 맛으로 기억된다. 뽀얗고 고소하고 담백한 콩국물에 적셔진 탱글 거리는 국수가닥의 쫄깃한 맛.
콩의 신선도와 삶는 시간 그리고 적절한 소금이 맛을 좌우할 거 같은데 내가 모르는 엄마만의 비법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온 식구뿐만이 아니라 앞집, 뒷집, 옆집까지 둘러앉아 별식으로 김치 하나만을 놓고 냉콩국수를 먹던 수많은 여름날 저녁도 영원히 별처럼 가슴속에서 반짝일 것이다. 그 비법을 이제쯤엔 전수받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번엔 기필코 엄마표 콩국수 레시피를 받아 오련다.
이 외에도 가끔 비린 것도 먹어야 한다며 특별 메뉴로 갈치조림을 했는데 그건 오빠가 특히 좋아했다. 가끔 자식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엄마는 오빠가 좋아하는 갈치조림이나 어묵 볶음을 했고, 동생이 좋아하는, 계란을 풀어 밥에 쪄낸 계란찜을, 때로는 언니와 내가 좋아하는 들기름에 소금 뿌려 구운 고소한 김을 상에 올렸다.
자식 하나하나마다 입맛을 챙겨주는 걸로 사랑을 표현하셨던 것이다. 그렇게 정성과 사랑을 조미료로 섞어 밥상에 올리던 반찬들을 생각해보면 지금은 다 별 것 아닌 반찬들이다. 특별한 메뉴도 없고 가지 수도 변변찮은.... 그렇지만, 그 음식들이 오늘날 얼마나 훌륭하고 건강한 음식들인지, 또 얼마나 그리운 추억의 맛인지. 어서 빨리 아이들의 입맛도 철이 들어 예전에 내가 먹던 음식들의 참맛을 알았으면 좋겠다. 나이 탓인가, 옛맛이 유난히 당기는 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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