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다이어리
서울 생각이 많이 날 때,
엄마가 보내준 둥굴레 차를 끓여 마시면 위로가 된다.
차를 끓일 때는 둥굴레와 옥수수알 차를 각각 한 웅큼씩 넣고 끓인다.(서울 집에서 늘 했던 것처럼.)
말리고 덖기를 아홉 번 했다고 말씀하시는 엄마는 좋은 것이니 자주 끓여 먹으라 하신다. 떨어지면 또 보내준다고, 아끼지 말고 먹으라고, 한 말을 하고 또 하신다.
부엌에서 둥굴레 차를 끓일 때면, 가끔 후암동 내 집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고,
구수하고 따뜻한 차를 두 손으로 감싸 마시면, 보고 싶은 가족들의 얼굴도 며칠은 더 미룰 수 있다.
작년 4월, 코비드19가 터지고 음식을 사먹을 수도, 배달을 할 수도 없었을 때,
가장 힘들었다. 만들 줄 아는 음식은 거의 없는데 한식은 먹고 싶고 –그것도 손 많이 가는 갈비찜, 곰국 같은 것– 집에서 겨우 해먹은 건 야채 비빔밥이 전부였을 때, 왠지 처량했다, 내 처지가. 먹고 싶은 것도 제때 못 먹게 된 베를린 생활이.
몇 개월 뒤, 동생이 엄마표 둥굴레 차와 멸치, 다시다, 표고버섯이 실하게 들어있는 국물용 다시팩, 고추가루 등을 보내줬을 때, 무인도에서 구조물품 던져받은 기분이었다. 서울에서도 거의 요리를 하지 않고 살았기 때문에(마흔 중반 딸을 위해 엄마는 때마다 김치와 반찬을 해가지고 오셨다), 나는 시중에 이런 다시팩이 있는 줄도 몰랐다. 베를린에 와서야 그런 마법의 국물내기 팩이 있다는 걸 알았다.
이제는 다시팩을 우려서 만둣국도 해먹고, 떡국도 끓여먹을 정도가 되었다. 다시팩을 우려 슴슴하게 떡국을 해먹으며 독일 짠 음식에 너덜너덜해진 내 혀를 위로한다. 그것만으로도 내 베를린 생활이 한 단계는 업그레이드된 것 같다. 다시팩은 일정 양의 물과 사용하라고 하지만, 그렇게 한번만 끓여먹고 버리기엔 아까워서 매번 두 배 이상 물을 부어 우리곤 한다. 궁상맞아 보일지 모르지만, 여기서 살다 보면 그렇게 된다.
엄마의 곰국이 먹고 싶다.
이제 나는 홍합도 손질할 줄 알고, 난생 처음 김치도 담가봤고, 냉동 낙지로 볶음도 해먹을 줄 알지만, 할 줄 아는 요리가 늘어난다고 해서 그리움이 줄어 드는 건 아니었다. 내가 여기서 해먹는 음식들은 나도 처음 먹어보는 맛이니, 그 맛은 뭔가 늘 부족하고 향수를 달래기엔 쓸쓸한, '추억이 없는' 맛이었다. 엄마는 겨울이면 시골 외할머니댁에 들어가 가마솥 가득, 하루 종일 곰국을 고셨다. 그렇게 정성 들여 만든 곰국을 혼자 사는 큰딸 먹인다고 매번 기차를 타고 가져오셨다. 그러면 나는 바로 먹을 분량만 꺼내놓고, 나머진 한번씩 꺼내 먹을 양만큼 담아서 냉동실에 깡깡 얼려 두고 겨우내 꺼내 먹었다. 뜨끈한 국물이 생각날 땐 얼린 곰국을 팔팔 끓여서 밥을 말아 먹었다. 베를린에선 이제 그런 일상은 가질 수 없지만.
나는 오늘도 둥굴레 차를 끓이며 서울 생각을 한다.
올해는 언제쯤 엄마의 곰국을 먹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