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딸은 어찌 키워야 할까.
나는 꽤나 예능 방송을 많이 보는 편이다. 한국에 있을 때보다 비교도 안되게 많이 보는 편인데 이게 참 신기하다. 몇 차례 이야기한 적이 있지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역시 지금의 집에는 티브이가 있고, 한국에서는 티브이가 없었다.(사실 한국에서는 티브이뿐만이 아닌 모니터 조차 없었는데, 이건 당시의 여자 친구, 그러니까 현재의 아내에게 플레이스테이션을 선물 받고 당장 중고나라를 통해 구입하며 해결되었다.) 또 한국에서는 이것저것 산만하게 돌아다니느라 집에 있던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아서, 굳이 방송에 대한 니즈 또한 별로 없었다.
집 앞에 대형 서점이 있어 시간을 보내기도 좋았고, 아메리카노를 시키면 1시간 내에 리필을 해주는 프랜차이즈 커피숍도 있어서 인터넷을 통한 볼 일은 주로 그곳에서 해결했다. 데이트하는 주말은 음식점이나 극장에 있었으니 더욱 티브이 볼 일이란 없었다고 할까. 그럼에도 아주 가끔은 꼭 보고 싶은 프로그램이 방영할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면 아예 H의 집에 가서 같이 시청하고는 했다.(H는 당시 여자 친구, 현 아내인데 이 설명을 반복하기란 너무 힘든 일이라 이제 H로 부르기로 한다.)하지만 역시 그런 일은 손에 꼽을 정도로, '대선 토론'이나 '응답하라 시리즈'정도의 경우였다.
가끔 그렇게 H의 집에서 티브이를 보며 시간을 보내는 것은 즐거웠지만, 사실 H의 집에 들락날락 거리는 순간은 항상 긴장되기 마련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H가 살던 원룸 건물의 주인분은 H의 외할머니였으며, H의 바로 옆집 원룸에는 그녀의 동생(지금의 체저)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할머님도 동생도 언젠가는 분명 만나 뵙게 되겠지만, 결혼을 앞두고 정식 인사를 하기도 전에 그런 식으로 원룸을 들락날락거리다 마주하고 싶지는 않은 것이 사실이었다. 특히나 가끔은 처제의 방으로부터의 인기척이 들리기도 했는데, 분명 처제에게도 우리의 인기척은 느껴질 것이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또 한 번 긴장의 순간이었다. 3층이었던 H의 집을 나서는 순간 나는 마치 닌자라도 된 것 마냥 살금살금, 하지만 부리나케 1층으로 걸어 내려갔다. 물론 엘리베이터도 있었지만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길 수 있는 엘리베이터는 결코 최적의 탈출 수간이 될 수 없었다. 그렇게 누구도 맞닥드리지 않고 건물의 현관에 다다르면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빠져나갔다. 잠깐의 긴장을 해소라도 해야 하는 듯 나는 곧바로 골목에 들어가 담배를 피우고서는,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여기까지 회상하다 보니 문득 친구 A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날도 여자 친구의 집에서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던 A는 갑작스러운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바로 그녀의 남동생이 예고 없이 방문한 것이었다. 당황한 그의 눈 앞에 들어온 것은 옷장이었고, 결국 그는 옷장 안으로 들어가 숨었다고 한다. 방문한 남동생이 다시 떠나길 얼마나 기다렸을까, 결국 그는 잠들었고 한참을 옷장에서 자게 되었다는 이야기. 결국 그 남동생 역시 지금은 A의 처남이 되긴 했지만, 그 시절 우리 모두에게 연애라는 것은 이렇게 순조롭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아휴. 이런 도둑놈 가득한 세상에서 대체 딸은 어찌 키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