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익숙해지겠지요.
출판을 위해 꾸준히 써오던 글을 대신해, 요 근래는 꾸준히 운동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 한 문장을 적고 다시 읽어 보자니 말이 좀 웃기다. 지금껏 피트니스 센터에서 글을 써왔던 것도 아닌데 글을 '대신하여' 운동을 하고 있다니 이처럼 얼토당토 한 핑계가 있을까. "저는 운동과 글쓰기를 병행할 수 없는 종류의 사람입니다. 운동을 하면 아드레날린이 솟구쳐서는 자리에 가만히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는 일은 상상할 수조차 없죠"라고 말하기에는 내 몸뚱이가 세상의 미적 가치를 충족시키기에는 터무니없다는 것도 한몫할 수 있겠다.
물론, 세상의 미적 가치를 충족시킨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다(그럼에도 유튜브의 화면 속에는 어찌나 몸짱들이 많은지!) 하지만 지금 내 솔직한 심경을 고백해보자면, 그래도 내 '종아리'만큼은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고 있지 않나. 라며 만족감을 드러내고 싶은 것이 사실이다. 글을 읽는 누군가는 '뜬금없이 웬 종아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나는 우리가 좀 더 통상적으로 이야기하는 하체나 허벅지가 아닌 종아리의 발전을 자랑하고 있으니 말이다.
나 역시 한때는 마른 종아리를 추구했던 적도 있었다. 요즘의 젊고 힙한 세대의 연예인처럼 스키니진이 잘 어울리는 남자가 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남녀를 불문하고 컨버스에는 분명 마른 종아리가 어울린다고 믿어왔기 때문이다. 이처럼 아는 사람만 아는 컨버스를 향한 나의 집착은 이렇게까지 비이성적이기에 충분했다. 차라리 이런 나의 집착이 일관적이었다면 지금처럼 살이 찌지도 않았을 텐데, 일관적이지 못한 나의 집착은 기어코 다리만 얇은 뚱뚱이를 탄생시키고야 말았다.
그렇다고 지금 종아리에 집중하게 된 이유가 '뚱뚱해졌을 바에 차라리 종아리라도 두껍게 해서 균형을 맞추자'라는 자포자기의 마음은 물론 아니다. 어느 날 문득 '잘 달리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라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좀 더 멋진 이유를 대며 둘러대고 싶은데, 정말이지 잘 달리고 싶은 이유 외의 다른 핑곗거리가 떠오르지가 않는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러닝 습관이 내게 준 자극이 무의식 중에 남아 있는 것인지, 친구 호영이의 조깅 다이어트가 인상적이었기 때문이었을지는 모르겠지만, 마음 한편으로 이제 나 역시 건강을 염려하게 되었다는 것은 분명하겠지.
이렇게 모르는 사이 컨버스에 대한 집착도, 내가 지키던 신념들도 변해가고 있다. '나이 듦'이라는 명제는 언제가 되건 변함없이 인정하기도, 인용하기도 싫은 자연의 섭리이겠지만 결국 나와 내 주변의 모두가 피해 갈 수 없는 유일의 진리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더 이상 볼 수 없고, 나는 잔병을 얻었다. 아내는 대견하게도 MBA의 두 번째 학기를 우수한 성적(?)으로 마무리하게 되었다. 나는 통증으로 인해 쉬고 있었던 작업을 다시 시작하기로 마음을 정했고, 아내는 이내 곧 마지막 학기를 시작할 것이다. 우리는 그저 지금의 신념을 잘 따르는 수밖에 없다. 곧 익숙해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