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프트웨어가 부당한 요구로 사용자를 괴롭히는 새로운 현상
‘갑질’은 사회⋅경제적 관계에서 우월적 지위에 있는 사람이 권한을 남용하거나, 그 지위로 인한 영향력을 행사하여 상대방에게 부당한 요구나 처우를 하는 것을 의미한다. 갑질의 ‘가해자’는 이러한 행위를 하는 사람이며, ‘피해자’는 그로 인해 피해를 입는 사람이다 (출처: 공공분야 - 갑질 근절을 위한 가이드라인, 법제처).
우리 속담에 ‘목마른 놈이 우물을 판다’는 말이 있다. 가장 급하고 필요한 사람이 먼저 행동한다는 뜻이다. 갑질은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발생한다. ‘아쉬운’ 사람에게 우월적 지위에 있는 사람이 부당한 요구나 처우를 하고, 그 ‘아쉬운’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이를 감내한다. 갑질을 설명하는 키워드는 ‘아쉬운 사람’과 ‘부당한 요구’라고 할 수 있다.
갑질은 우월한 갑이 아쉬운 을에게 부당한 요구를 하는 것이다
최근 우리는 다른 종류의 부당한 요구들을 마주하게 되었다. 다음은 이 책을 집필하기 시작하면서 일상생활에서 겪은 사례들이다.
패스트푸드점의 키오스크 앞에서 주문 방법을 몰라 쩔쩔매는 어르신을 도와드렸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셨지만,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하셨다.
고객센터에 전화를 하면 자동응답시스템(ARS)이 연결된다. 메뉴를 선택하는데 맞는 옵션이 없어서 세네 번 반복하고, 잘못 선택하면 다시 전화를 걸어야 한다.
아이스크림 매장에서 1+1 쿠폰을 사용하려 했지만 키오스크에서 여러 번 시도하다 결국 포기했다.
인천공항 주차비 할인을 신청했지만, 신분증 정보(주민번호 뒷부분을 검게 가려야 한다)가 제대로 마스킹되지 않아 신청이 실패했다.
온라인에서 의자를 검색한 후 한 달째 인스타그램에서 관련 광고만 주기적으로 보게 되었다.
운전 중 국가 재난문자가 너무 자주 와서 길 안내를 방해한다.
전자제품 수리 신청 후 방문 당일에 부품이 없어 수리가 불가능했다는 통보를 받았다. 난 분명히 부품이 필요하다고 신청할 때 말했었는데 수리기사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한 학교에서 강사등록을 위해 필요한 서류로 건강보험득실확인서와 재직증명서를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이를 위한 웹사이트에서는 파일은 하나만 등록할 수 있었다. 암호화된 건강보험득실확인서를 스캔해서 다른 문서와 합치는 데 30분이 걸렸다.
서비스마다 비밀번호 설정 규칙이 달라 일관성 있게 관리하기 어렵다.
유료 구독을 취소하고 싶지만 찾기 어려워 원치 않는 요금을 지불했다.
이러한 사례들은 과거에는 없던 문제들이다. 이는 키오스크가 없던 시절, 웹사이트가 없던 시절, 서류를 직접 제출하던 시절에는 없었던 문제들이며,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의 부작용, 정확히 말하면 잘못 설계된 소프트웨어로 인해 발생한 불편함이다.
이러한 불편을 우리는 감내할 수밖에 없다. 음식을 키오스크에서만 주문해야 하고, 주민번호를 마스킹한 이미지를 만들어야 하고, 암호화된 PDF를 다른 문서와 합쳐야만 한다. 이는 갑질과 다르지 않다. 우리가 ‘아쉬운’ 입장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이를 '디지털 갑질'이라고 부를 것이다. 디지털이 사람들에게 부당한 요구를 하는 현상이 바로 디지털 갑질이다.
잘못 만들어진 소프트웨어(갑)가 아쉬운 사용자(을)에게 부당한 요구를 하는 것이 디지털 갑질이다.
디지털 갑질은 기존 갑질과 달리 가해자가 사람이 아닌 소프트웨어라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다. 사람일 경우 대화나 협상이 가능하지만, 소프트웨어, 특히 인공지능이 적용된 소프트웨어에는 그럴 수 없다. 우리는 ‘아쉬워서’ 감내하지만 ‘부당하다’는 마음은 점점 더 커진다.
갑질은 명백히 나쁜 것이며, 사회는 갑질을 없애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디지털 갑질에 대해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디지털 갑질로 인한 불편함은 잘못 만들어진 소프트웨어로 인해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으며, 이를 막기 위한 노력도 대부분 늦은 대응에 그치고 있다. 이 때문에 사용자는 계속해서 디지털 갑질을 겪고 있고, 정부와 기업은 디지털 전환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예산을 낭비하고 있다.
(다음 글로 연재합니다. 브런치 매거진은 https://brunch.co.kr/magazine/digitalgapjil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