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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석 Nov 19. 2024

디지털 갑질: #7 잘못된 처방

사용성 평가를 하고 전문가 한두 명 채용하는 것으로는 해결하기 어렵다


토요일 아침 7시 24분, 전화가 왔다. 우체국 배달원이었다. 내가 전날 보낸 소포에 적힌 주소에 건물 이름이 없어 확인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나도 수신자에게 받은 주소를 그대로 적었기 때문에 건물 이름을 알 수 없다고 답했다. 또한, 이전에도 같은 주소로 소포를 보낸 적이 있으니 틀리지 않았을 거라고 말했다. 그러자 배달원은 "주소를 이렇게 쓰면 우리가 어떻게 배달하냐"며 화를 냈다. 나는 당황스러웠다. 결국, 우체국 고객센터에 불편 신고를 했다. 며칠 후, 해당 지역 우체국의 한 직원이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배달원이 명절에 단기 채용된 인력으로, 실수를 한 것 같다고 사과하며,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교육하겠다고 말했다.


이 사건은 내가 이 책을 쓰는 중에 실제로 겪은 일이다. 이 사건에 등장하는 모든 관련자는 피해자다. 토요일 아침부터 불쾌한 경험을 한 나(고객), 잘못된 주소로 어려움을 겪은 배달원(직원), 고객 불편 신고를 처리해야 했던 고객센터 직원(직원), 그리고 고객 불만족을 해결해야 했던 우체국(회사) 모두 피해자였다. 이는 디지털 갑질 문제의 전형이다. 더불어 "직원을 교육하겠다"는 사후 조치 또한 잘못된 디지털 갑질 예방 대책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디지털 갑질에 대한 잘못된 처방이 너무 많다

이 조치가 과연 올바른 처방일까? 잘못된 주소로 인한 반송 문제는 이미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을 것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우체국에서 소포를 보낼 때 고객과 직원의 경험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컴퓨터에 입력된 주소를 소프트웨어가 검토해 주는 시스템은 어떨까? 입력된 주소가 이전에 배달 성공한 적이 있는지 확인하고, 문제가 있다면 고객에게 알림을 보내거나 주소 확인을 요청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전 주소를 최신 도로명 주소로 자동 변환하는 기능도 제공할 수 있다.


서울시의 키오스크 사례도 유사하다. 서울시는 키오스크 사용을 어려워하는 노인들을 위해 공공시설에 ‘디지털 안내사’를 배치하기로 했다(출처: 스마트포털서울). 서울시 관계자는 "모든 시민이 디지털 강자가 되는 그날까지 디지털 약자 배려 캠페인 확산 및 디지털 역량 강화 교육 등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출처: 한국경제신문, 2023.2.11).


그러나 이 조치가 올바른 처방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디지털 안내사가 키오스크 사용법을 안내해 준다고 해서 다음번에 고객이 이를 따라 할 수 있을까? 현실적으로는 디지털 안내사들이 배운 내용을 대신 처리해 주는 경우가 많다. 즉, 급한 상황을 해결해 주지만, 고객이 키오스크 사용법을 습득하지는 못한다. 결국 디지털 안내사는 지속적으로 운영되어야 한다. 이는 키오스크 사용법을 알려주는 직업을 새롭게 창출한 셈이다. 공항의 셀프체크인 키오스크에 직원을 배치한 사례와도 비슷하다.


조달청의 나라장터 사례도 있다. 조달청은 유튜브 콘텐츠를 제작해 나라장터 사용법을 설명하고 있으며, 이 콘텐츠는 높은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조치 역시 올바른 처방이라고 보기 어렵다. 이는 조직과 고객 모두에게 추가적인 노력을 강요하는 방식일 뿐이다. 조달청은 시스템 개발과 운영에 예산을 투입했을 뿐 아니라, 콘텐츠 제작 비용까지 추가로 사용하고 있다. 이는 문제 발생 후 외양간의 일부를 수리한 정도로 보인다.


디지털 갑질은 사용성 평가나 UX 팀장 한두명 채용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사용자 중심 개발에 대한 의식이 있는 조직은 종종 사용성 평가를 진행하고 UX 전문가를 몇 명 채용한다. 그러나 이런 접근은 대개 실패로 끝난다. 사용성 평가를 2~3년 진행해도 사용자 경험이 나아지지 않는 것은 물론, UX 조직과 개발 조직 간의 불화가 생기는 경우가 많다. 또한, 새로 영입된 UX 팀장은 회사에서 기여하지 못하고 어려움을 겪다가 퇴사하는 일이 빈번하다. 그 이후 해당 조직에서는 UX가 금기어처럼 취급되고 사용자 경험에 대한 논의 자체가 중단되는 '암흑기'가 시작되기도 한다.


첫째, 사용성 평가 자체가 아니라, 이를 활용하는 방식이 문제다. 사용성 평가는 보통 소프트웨어가 완성된 후에 진행되는데, 대부분의 개발과 설계가 완료된 상태에서 발견된 문제는 수정이 어렵고 비용도 많이 든다. 가장 효과적인 방식은 프로토타입이나 초기 설계 단계에서 평가를 진행해 문제를 발견하고 수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조직은 이를 간과한 채, 사용성 평가를 최종 단계에서 형식적으로만 진행한다. 그 결과, 사용성 평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조직의 문화와 시스템에 변화를 주지 못한다.


둘째, 사용자 중심 설계의 필요성을 느낀 조직은 종종 경험 많은 UX 팀장을 외부에서 영입해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그러나 단 한 명의 리더로 조직 문화를 바꾸려는 시도는 대개 실패한다. 조직 문화를 바꾸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삼성전자, LG전자, 네이버 같은 회사들도 사용자 경험 중심 문화를 정착시키기까지 수년간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이러한 문화는 단순히 "사용자 중심으로 개발하라"는 지시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고방식, 프로세스, 도구, 평가 방식까지 조직의 모든 부분에서 변화를 요구한다.


셋째, 사용자 경험을 중시한 회사들과 그렇지 않은 회사들 사이에는 이미 20년의 격차가 존재한다. 요즘에 이직하는 UX 팀장급 인재들은 사용자 경험이 정착된 환경에서 일하며 성과를 냈다. 그러나 초기 사용자 중심 문화를 구축하기 위해 고군분투한 선배들과 달리, 이들은 이미 완성된 사용자 중심 개발 문화에 익숙하다. 그 결과, 조직의 문화를 바꾸는 데 필요한 고통과 인내, 체계적 접근 방식을 경험하지 못했다. 따라서 새로운 환경에서 사용자 경험 중심 문화를 도입하고 정착시키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조직은 사용자 경험을 단기적으로 개선하려는 시도를 넘어서, 장기적인 관점에서 체계적이고 지속 가능한 문화를 구축해야 한다. 그것이 고객, 직원, 그리고 조직 모두를 위한 진정한 해결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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