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러 교향곡 제1번 '거인'
실존은 투쟁이며, 이 세상은 투쟁의 장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실존은 무엇을 위한 투쟁인가. 이에 대해 심리학자 매슬로우는 인간으로 태어나 누리는 가장 높은 차원의 욕구를 ‘자아실현의 욕구’라 했고, 철학자 야스퍼스는 실존이란 곧 ‘자기 자신을 실현하는 과정’이라고 했다.
그 실존의 과정 중 철학자 야스퍼스에게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은 ‘한계상황’이었다. 모든 인간은 저마다 주어진 삶에서 다양한 ‘한계상황’에 부딪히게 되는데 야스퍼스는 사람이 혼자서는 자기실현에 도달하지 못하고 꼭 타자를 필요로 한다고 보았다. 마치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서 싱클레어가 데미안과 에바 부인을 통해 세상을 극복했던 것처럼.
영화 '매트릭스'를 보면 주인공 네오는 결국 모두가 기다리던 ‘그 (the one)’로 불리게 된다. 모든 것을 깨닫고 초월한 자. 인류를 구원하기 전에 이미 자기 자신부터 구원한 ‘그.’ 기독교의 예수나 불교의 부처, 조로아스터교의 차라투스트라가 그랬던 것처럼 그는 결국 ‘초인 (superman)’이 되었다.
매트릭스는 유약하기만 했던 평범한 시민 ‘미스터 앤더슨’이 세상의 본질을 똑바로 마주하게 되면서 그의 실존적 자아인 ‘네오’로 거듭나는 과정과 그 과정을 방해하는 세상과의 전쟁을 그리고 있다. 앞서 언급한 야스퍼스의 철학관과 비슷하게 주인공이 모피어스나 트리니티 같은 주변 인물의 도움을 통해 깨달음이라는 고난의 초월 과정에서 승리해 결국 본질적 자기 실현을 이루고 만다는 서사의 작품성은 가히 문학에서 헤세의 ‘데미안’에 비견될 만한 걸작이 아닐까 싶다.
문학에 헤세의 ‘데미안’이 있고, 영화엔 ‘매트릭스’가 있다면, 음악에는 말러의 심포니 1번 ‘거인’이 있다. 나는 이 곡을 처음 들었던 순간부터 말러가 붙인 ‘거인’이라는 표제가 어쩌면 니체의 ‘초인’에 더 가까운 느낌이 아닐까에 대해 생각하곤 했었다.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가 20대 중후반 무렵이었던 1888년에 쓴 교향곡 1번 ‘거인’의 1악장은 자연의 평화로움으로 시작한다. 마치 새싹이 돋는 듯한 아침 들판의 모습과 뻐꾸기의 울음소리 등과 함께 이제 막 잠에서 깬 것 같은 유년기 거인의 세상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1악장의 발전부에서는 평화로운 ‘아침 들판’ 주제의 반복에 이어 묘하게 음산한 화성이 섞이기 시작하는데 이는 마치 ‘데미안’에서 유년기의 싱클레어가 세상의 이중성을 처음 감지하기 시작했던 때처럼 불안하다. 하지만 포르티시모의 트럼펫 팡파르가 터지기 시작하면서 막 세상에 눈을 뜬 거인에게 4악장에 있을 최종 승리의 힌트를 쥐어주며, 건강한 힘의 클라이맥스와 함께 1악장이 끝난다.
2악장에서 말러의 거인은 속세를 경험하게 된다. 실제로 농민들의 춤곡인 렌틀러를 바탕으로 작곡된 악장답게 말러는 오케스트라 주자들을 마치 시골 밴드의 악사처럼 연주하게 하는데 1악장에서 장대하고 평화로운 천국에서 거주하던 거인으로 하여금 마치 세속적 밑바닥 인생이 주는 디오니소스적 체험이라도 시키는 듯한 분위기가 이어진다.
3악장에서 거인이 경험하는 세계의 세속성은 2악장을 뛰어넘는다. 진지하기 그지없는 교향곡에서 말러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동요 ‘Are you sleeping, Brother John'의 멜로디를 단조로 뒤틀어버린 테마로 시작하는데 이것은 당시의 청중들에겐 굉장히 충격적인 일이었다. 누구에게나 익숙할 법한 선율에 어두운 옷을 입혀 인간의 가장 큰 약점인 죽음을 드러내는 장송행진곡으로 시작하는 3악장은 뜬금없이 싸구려 서커스에서나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쿵짝쿵짝 카바레풍의 보헤미안적 선율과 섞이는 등 거인으로 하여금 세상 가장 밑바닥의 슬픔과 함께 인간이라는 존재가 지닌 비천한 나약함을 똑바로 목도하도록 한다. 이 장면은 마치 영화 매트릭스에서 네오가 동료들의 죽음을 목격한 후 각성하는 것처럼 4악장에 이르러 거인의 세계를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는 중요한 경험이 된다.
마지막 4악장에 들어서면 거인은 세상이 선물하는 본격적인 절망과 마주하게 되는데 이제부터 자신을 둘러싼 ‘한계상황’과의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된다. 피 튀기는 전쟁터에서 처절한 울부짖음이 잦아들고 나면 야스퍼스의 타자, 싱클레어에게 있어 에바 부인, 그리고 네오에게 있어 트리니티와도 같은 달콤한 위로의 선율이 때때로 거인을 감싸 안으며 천국 금 면류관의 주인인 거인의 각성을 재촉한다. 이때 등장하는 위로의 선율이 어찌나 마음을 아리게 하는지 그 아름다움에 이 곡을 들을 때마다 목이 멘다.
이후로도 세상은 끊임없이 불안한 크레셴도로 거인을 압박하지만 거인은 1악장에서의 트럼펫 팡파르를 기억해낸다. 이내 거인은 2악장과 3악장에서 느꼈던 속세의 비통과 절망의 무게를 찢어내고 트럼펫에서 호른으로 이어지는 장엄한 승전가를 통해 승리의 깃발을 꽂고 일어서게 되는데 이때 건강하게 폭발하는 20대 말러의 포효는 우리에게 진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말러의 교향곡들 대부분이 그렇지만 1번 교향곡의 피날레 역시 맺혀있던 설움을 터뜨리고 승화시키는 점에서 우리 한국인의 정서에 더욱 와 닿는 측면이 있다.
실존은 투쟁이며, 이 세상은 투쟁의 장이다. 우리 모두의 열반이 싱클레어나 네오, 또는 말러의 거인처럼 거창하지는 않더라도 우리는 지금도 저마다의 세상과 한 판 레슬링을 벌이는 중이다. 시간이 지나면 야스퍼스의 말대로 크고 작은 ‘한계상황’을 겪게 될 것이고 때로는 이기고, 또 때로는 지게 되겠지.
하지만 거인의 삶에는 늘 ‘타자’가 있었다. 죽음을 둘러싼 인간의 나약함은 변함이 없지만, 결국 우리를 강하게 만드는 것은 세상을 딛고 보란 듯이 일어나려는 의지와 또 내 곁의 당신이라는 것. 말러도, 그리고 그의 교향곡 1번 ‘거인’도 많은 이들의 인생에 ‘타자’로 남았다. 나도, 당신도 우리는 서로의 삶에 ‘타자’가 됨으로써 비로소 거인의 삶을 체험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이동수
나의 추천 앨범/명연주
Claudio Abbado (conductor)
Berliner Philharmoniker
녹음: 1989/12, Stereo
장소: Berlin Philharmonie
카라얀의 뒤를 이어 베를린 필하모닉 상임 지휘자가 된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자신의 취임 기념 연주회에서 남긴 녹음이다. 잘 벼려진 칼처럼 완벽하게 연주된 말러의 1번으로 손꼽힌다. 놀라우리만큼 깔끔하고, 시종일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진행되면서도 빈틈없는 연주다. 마치 최고의 스위스 시계 장인이 만든 최고급 시계 같은 연주에 비유할만하다. 다만 레너드 번스타인이 연주한 ‘거인’처럼 육중하거나 파워풀한 헤비급의 승전가는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이 유일한 단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