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의 문 앞에서

by 이동수

우리의 삶은 신비로 가득하다. 한 인간으로 살면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은 아마도 삶의 신비를 마주하고 경탄할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이에 대해 천재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신비는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경험이며, 진정한 예술과 참된 과학의 원천이다. 누구든 신비의 경이로움을 느끼고 감탄하지 못한다면, 그는 죽은 자와 다를 바 없다.”


Einstein-1240x1536.jpeg 알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933년


나는 지금도 여전히 거울에 비치는 내 모습이 신기하게 느껴진다. 인간의 몸이 이렇게 생겨 작동하는 것도 경이롭지만, 세월의 흔적이 서서히 얼굴에 새겨지고 있음을 알아차릴 때는 더욱 그렇다. 우리를 둘러싼 형형색색의 동식물들과 찬란한 계절의 변화, 물과 불, 공기 같은 원소들, 그리고 지금까지 인간이 이루어낸 사회 시스템과 웅장한 건축물들은 또 어떤가. 나아가 태양과 달을 포함한 우주의 수많은 행성들과, 마치 도깨비 나라의 법칙처럼 느껴지는 양자역학의 세계에까지 이르게 되면 놀라움은 배가 된다. 이 무한한 신비와 함께 오늘도 수없이 반복되고 있을 삶과 죽음, 창조와 파괴, 그리고 선과 악의 흐름 속에서 대체 우리는 어떤 목적을 위해 존재하며, 이 모든 것들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제껏 세상의 신비를 설명하기 위해 많은 철학자와 종교지도자, 그리고 과학자들이 그들의 인생을 바쳐왔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철학, 종교, 그리고 과학은 인간의 경험과 이해를 바탕으로 세계를 설명하려는 노력의 산물이었을 뿐이다. 대개의 경우 이들은 물질적인 세계를 중심으로 한 유물론적 틀에 갇혀 있거나 타인을 설득하기 위해 만들어진 체계를 뛰어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동안 철학은 인간의 이성과 논리적 사고를 극대화시켜 존재의 본질을 탐구했지만, 종종 우리의 의식 작용과 물질의 관계, 초월적 경험에 대해서는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종교는 신성한 진리와 구원을 통한 초월에 대해 설명하고자 하였으나 대부분 신화나 상징, 그리고 명시적으로 합의된 도그마의 수준에 머물렀으며, 과학은 놀라운 성과를 통해 물질세계의 구조와 작동 원리를 밝혀내고 있지만, 여전히 인간 의식의 기원과 존재의 근원, 혹은 우리가 경험하는 수많은 신비로운 현상들에 대해 답을 내리지 못한다.


결국 철학과 종교, 과학은 각자의 영역에서 신비를 설명하려 애썼지만, 모두 각기 다른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세상을 그저 물질적이고, 논리적인 영역으로만 설명하려고 하면, 비물질적이고 의식적인 영역에 대해서는 올바른 설명이 불가능해진다. 아인슈타인이 양자역학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이유에서도 알 수 있듯이 철학에서는 형이하학과 형이상학이, 종교에서는 현교(顯敎)와 비교(祕敎)가, 과학에서는 고전역학과 양자역학의 통합이 요원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틀을 넘어 물질과 의식, 형이하와 형이상, 논리와 직관 사이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드는 통합적인 접근을 시도해야만 한다.


오랫동안 우리 인간은 유물론적 시각에 갇혀 자신과 세상이 영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잊고 지내왔다. 그나마 고대의 인류는 자신과 세상의 영적 본질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으나 모든 것들이 빠르게 물질화되기 시작하면서 인간은 자신의 진짜 정체성을 잊어버렸다. 이는 하나의 숲으로써 존재하는 자신에 대해 알지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그저 나무 한 그루로 인식하고, 그동안 나무의 습성에 대해서만 연구하며 세상을 파악해 온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우리가 신비주의에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기존의 틀을 뛰어넘는 새로운 시각과 담대한 의지가 필요하다. 신비는 쉽게 해명되거나 논리적으로 설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경험되고 탐구되어야 하는 세계이다. 만약 신비가 논리적으로 쉽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이었다면 애초에 신비라 불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노자는 이를 빗대어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멋진 신세계>라는 작품으로 유명한 작가이자 철학자인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는 신비주의야말로 ‘영원의 철학(perennial philosophy)’이라 칭했다. 그가 말한 ‘영원의 철학’은 시대와 문화를 초월해 모든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진리를 탐구하는 것을 뜻한다. 이는 모든 철학과 종교, 그리고 과학의 근본적인 공통점을 찾아내 본질적인 통찰을 거쳐 삶의 의미와 우주의 본질을 이해하려는 접근이다. 헉슬리는 모든 위대한 전통이 결국 하나의 진리에 다다르려는 길이라는 점을 강조했는데 신비주의야말로 바로 그 통합의 길, 즉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를 향해 열려있는 문이라고 할 수 있다.


huxley-uai-864x576.jpeg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의 생전 모습


일반적으로 신비주의에 대한 정의를 찾아보면 ‘초월체험 또는 비일반적인 의식상태를 통한 궁극적 실재와의 합일’ 정도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는 엄밀히 말해 신비주의의 한 단면의 불과하다.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신비주의의 의미는 궁극적 실재와의 합일 체험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한 ‘거듭남’에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거듭남’이란 각종 종교에서 약속하는 내세에서의 구원이 아닌, 지금 우리가 발을 딛고 서있는 현생에서의 부활과 소생, 그리고 새로운 창조를 의미한다.


부활은 필연적으로 죽음의 선행을 필요로 한다. 죽음은 흔히 삶의 끝으로 여겨지지만, 신비주의적 관점에서 그것은 새로운 시작의 문턱일 뿐이다. 이때의 죽음은 단순한 육체적 죽음이 아닌, 우리의 에고(ego)와 집착, 그리고 제한된 자기와 세상에 대한 인식의 소멸을 뜻한다. 신비주의적 부활이란 결국 이러한 에고의 죽음 후에 도래하는 새로운 깨달음의 상태이며, 이를 통해 진정한 자신과 우주의 본질을 직면하고 더 큰 의식의 세계로 나아가는 일을 말한다.


부활의 핵심은 변화에 있다. 이는 더 이상 과거의 눈으로 세상을 보지 않고, 완전히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며 삶의 신비와 경이를 받아들이는 태도다. 이러한 변화는 때로 벼락 맞는 것처럼 갑작스럽게 찾아오기도 하지만 대개의 경우 지속적인 노력과 자기 성찰, 세상에 대한 관심과 신비적 체험을 통해 서서히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신비주의는 단순히 궁극적 실재를 경험하는 순간적 체험이 아니라, 그 경험을 통해 삶의 모든 차원을 변화시키는 지속적이고 포괄적인 여정을 포함해야 마땅하다.


예를 들어 기독교 신비주의에서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단순한 역사적 사건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내면에서 경험할 수 있는 영적 과정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본다. 불교에서도 마찬가지로 깨달음을 얻기 위해 자신의 욕망과 집착을 ‘죽이는’ 과정을 중시하며, 고대 수메르와 이집트에서 출발해 현대의 프리메이슨에 이르기까지 신비주의적 의식은 늘 상징적 죽음 이후 현생에서의 새로운 삶을 위한 부활을 기념하곤 했다. 이 모든 전통들은 우리에게 은연중에 신비주의적 죽음과 부활의 과정이 꽤나 보편적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우리가 이러한 신비적 부활을 경험하게 되면 세상과 우리 자신을 새로운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 과정은 개인적 차원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철학과 종교, 과학을 통합시키며, 우리가 속한 공동체와 우주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여러 개인의 변화는 곧 공동체와 사회, 그리고 궁극적으로 인류 전체의 변화를 촉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신비주의적 부활은 과거의 관습과 도그마를 파괴하고, 곧 새로운 창조의 씨앗이 된다.


모든 파괴가 그렇지만 에고의 해체와 기존 관습의 붕괴는 고통을 수반한다. 따라서 이는 늘 현 상태의 한계를 직면하고 초월하려는 담대한 의지를 필요로 하기 마련이다. 과연 우리는 익숙한 틀을 벗어나, 새로운 자신과 세계를 만날 준비가 되어 있는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자.


이제 당신의 눈앞에 갑자기 커다란 문이 하나 나타난다. 높이가 5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문의 웅장함이 당신을 압도한다. 이 문은 올리브 나무로 만들어졌으나 금으로 도금이 되어 있는데 햇빛에 반사되어 천상의 것과도 같은 눈부신 광채를 발산하고 있다. 정면에는 천사들과 야자나무, 꽃무늬 모양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고, 양 옆으로는 거대한 느낌의 기둥 두 개가 나란히 건물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당신은 눈앞에 보이는 문을 열고 들어갈지, 아니면 왔던 길을 되돌아 갈지 선택해야 한다. 이 문은 당신을 지금까지의 일상에서 떼어내고, 새로운 여정으로 인도할 것이다. 한 가지 알아두어야 할 점은 문 안으로 한 번 발을 들이면 이전으로 다시 돌아가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문 너머의 세계는 혼란스러워 보이는데다 당신에게 두려움을 줄 수 있지만, 동시에 경이와 깨달음으로 가득 차 있다. 이제 우리는 신비의 문 앞에 서서 더 이상 질문자가 아닌, 탐험가로 스스로의 발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처음엔 캄캄해 보이는 통로를 한 발자국씩 외롭게 걷다 보면 조금씩 밝은 빛이 나타나 당신을 가야 할 곳으로 안내해 줄 것이다.


걱정하지 말자. 이 길 위에서 우리가 비로소 참된 부활, 즉 현생에서의 진정한 거듭남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고 생각하면 위로가 된다.


이동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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