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중학교 2학년 때였다. 동네 서점에 들렀다가 제목이 마음에 들어 샀던 책이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었다. 학교에 가지고 가 쉬는 시간에 읽으려고 책을 펼쳤는데 처음 두 페이지를 읽고 큰 충격을 받았다.
소설은 니체의 ‘영원회귀(Ewige Wiederkehr)’ 사상으로 시작한다. 쉽게 말해 ‘영원회귀’란, 마치 한 편의 영화 필름 속에 모든 장면이 프레임 별로 고정되어 있어서 영화가 재생될 때마다 같은 장면이 무한히 반복될 수밖에 없듯, 우리 삶의 모든 순간들이 끝없이 반복 재생 된다는 얘기다.
밀란 쿤데라는 만약 같은 인생이 무한한 횟수로 반복되어야 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혔듯 영원성에 못 박힌 꼴이며, 이것은 끔찍한 일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그만큼 매 순간이 지니는 실존적, 선택적 무게가 우리를 무겁게 짓누르기 때문이다. 삶의 모든 순간들이 박제되어 이 우주 한 켠에서 무한히 반복되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 부담감에 압도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다행히 우리 인간은 평소에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고 사는 데다 시간을 매우 선형적으로 인식한다. 게다가 한 번 지나간 사건은 결코 되돌아오지 않는다고 느끼기 때문에 깃털 같은 우리의 삶은 매 순간을 그저 일회성으로 착각하는 찬란한 가벼움을 갖는다.
탁월한 작가였던 밀란 쿤데라는 소설의 첫 장에서 이 극적인 대비를 연인의 섹스에 빗대어 다음과 같은 표현을 남긴다. ‘영원회귀’의 무거운 무게가 우리를 짓눌러 깔아 눕히는 것은, 마치 남자 육체의 하중을 갈망하는 여자의 모습처럼, 가벼운 우리의 삶을 통해 가장 격렬한 생명의 완성을 이뤄낸다고. 그 짐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우리의 삶은 보다 생생하고 진실해진다고 말이다.
사실 ‘영원회귀’ 사상의 아이디어를 처음 꺼낸 사람이 니체였던 것은 아니다. 이미 그리스 스토아학파였던 크리시포스 등의 사상에서 ‘영원회귀’의 흔적을 찾을 수 있지만, 니체는 이 개념을 존재론적, 우주적 관점에서 조금 더 발전시켰고, 본인 철학의 핵심 사상으로 삼았다. 이에 대해 독일의 철학자 칼 뢰비트는 ‘영원회귀야말로 니체 본래의 철학’이라 하기도 했다.
만약 우리의 삶에서 기쁘고 감동적이었던 순간뿐 아니라 슬프고, 절망적이며, 폭력적이었던 순간들까지 모두 우주 한 켠에서 영원히 반복된다고 가정해 보자. 과연 우리는 그 모든 순간을 온전히 껴안고, ‘영원회귀’의 십자가에 못 박힐 수 있을까. 모든 것의 시작점으로 돌아가 ‘그래도 이 끔찍한 생이여, 다시 한번!’을 외칠 수 있을까.
1889년의 1월은 니체의 정신이 디오니소스적 광기로 급격히 무너지고 있을 때였다. 이탈리아 토리노에 머물던 니체는 우연히 한 마부가 말을 학대하며 채찍질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그 장면에 크게 충격을 받은 그는 말에게 달려가 말의 목을 붙잡고 목놓아 울다 졸도했다고 전해진다. 마부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겠지만, 아마도 그 순간 니체가 끌어안았던 것은 영원의 굴레에 못 박힌 채 무한히 채찍질을 당하고 있을 말의 숙명이었을 것이다. 이후 깨어난 니체는 남은 인생을 정신병자 취급받다 죽었다.
그의 저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는 인간의 정신이 삶을 극복하는 세 단계의 과정에 대해 쓰여있다. 이는 낙타 -> 사자 -> 어린아이로의 단계인데, 낙타는 삶의 당위성이라는 무거운 짐을 감당하는 가장 보편의 인간을 상징한다. 이후 세상으로부터 주어진 당위성을 벗어던질 용기를 가진 인간은 자신의 ‘의지’를 바탕으로 대담한 정신과, 스스로에 대한 신뢰로 가득 찬 사자로 변신한다. 하지만 사자는 아직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내지는 못한다. 이 단계에서는 그저 삶의 모든 의무와 당위를 거부할 ‘자유’만을 누릴 뿐이다.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는 정신은 모든 존재를 있는 그대로 긍정하며 포용하는, 무구한 어린아이와도 같은 경지에 이른다.
이때 ‘영원회귀’라는 터널은 인간의 정신이 ‘어린아이’의 단계에 이르는 데에 가장 빠른 길을 제공한다. ‘영원회귀’를 통해 나의 숙명과도 같은 ‘존재’에 대한 ‘긍정’에 도달하게 되면, 결국 사람은 자신의 ‘운명을 사랑(Amor Fati)’할 수 있게 된다. 어떤 이들은 니체의 말년이 불행했다고 말하겠지만, 그는 모든 순간을 긍정하였으며, 자신의 운명, 더 나아가 우리 인간의 모든 숙명을 마음 깊이 사랑했다.
평소 우리가 인지하는 직선적 시간에서는 끊임없이 과거의 모든 것이 미래에 쓸려 사라지고, 미래의 모든 일은 과거에 묻힌다. 이에 대해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영원한 ‘현재’만이 남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영원한 현재는 시간이 아니라 ‘영원성’ 그 자체가 아닌가.’
우리가 ‘영원’을 떠올려 보면 왜인지 미래가 끝도 없이 이어질 것 같지만, 사실 ‘영원’ 속에서는 시간의 개념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순간’으로 남는다. 거기에는 파도처럼 휩쓸리는 과거도, 미래도 없다. 하이데거는 이를 두고 “영원은 순간 속에 있으며, 순간은 무상한 지금이 아니고, 관찰자가 지나가며 보는 한 찰나가 아니다. 그것은 과거와 미래의 상충일 뿐이다”라고 했다. 하이데거의 말처럼 과거와 미래가 상충하는 우리 삶의 매 ‘순간’에는, 긍정과 부정, 빛과 그림자와 같이 세상의 모든 이분법적인 것들이 하나로 만난다. 이는 더 이상 육화 된 물질세계의 공식이 아니며, 영적인 차원에서의 법칙을 따른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물질세계의 시간은 엔트로피 법칙에 의해 순환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영원은 시간에 모순되고, 시간은 영원에 모순되기 때문에 결국 이 둘 사이에는 인간의 영혼을 통해 기록된 ‘순간’과 그것의 ‘영원회귀’만이 남는다.
니체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사실 반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는 신이 제공하는 이상을 버리고 세상을 긍정하는 초인이자 ‘지상의 주인(Herr der Erde)’이 되고자 했다. 신이 약속한 천국에서의 영생을 꿈꾸며 삶을 낭비하는 대신, 육화 된 물질세계에서 지상의 주인이 되는 방법은 간단하다. 바로 영혼을 자각하고 ‘무한히 반복되는’ 지금 이 ‘순간’을 통해 ‘영원’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때로는 내 삶의 순간이 채찍질당하는 말과 같을지라도, 영원히 순환하는 그것을 끌어안고 엉엉 울 수만 있다면, 그리하여 기꺼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처럼 온전히 자신의 숙명을 우주에 기록할 수 있다면, 어쩌면 우리는 바로 거기서 새로운 생명력을 가지게 되고, 이 땅에서 사는 동안 니체가 말한 불사성(Unsterblichkeit)을 이루게 될지 모른다.
최근 우리 집 첫째 고양이가 건강이 안 좋아 보이자 아내가 근심 가득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이 녀석이 아프지 말고 우리랑 영원히 살았으면 좋겠어.”
그래서 나는 이렇게 대답해 주었다. ‘이 우주 한 켠에는 이미 이 녀석이 우리와 함께 영원히 살고 있어. 언젠가 얘도 세상을 떠나게 될 것이고, 그때도 당신은 이 녀석을 그리워하며 지금과 똑같은 바람을 가지게 되겠지. 하지만 과거, 현재, 미래는 그저 착각일 뿐이야. 모든 순간은 동시에 존재해. 언젠가 당신이 이 녀석을 잃었을 때, 함께 있고 싶다는 바람이 너무 간절했기 때문에 그 소원이 이루어진 현실이 바로 지금이야. 바로 지금 이 녀석이 우리 옆에서 골골대는 이 순간은 무한히 반복되고 있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 친구를 그저 조금 더 안아주는 것뿐이야. 이 녀석은 이미 영원히 살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라고.
이동수
태양이 정오에 섰을 때 : 차라투스트라는 창공을 응시하였다. 머리 위 하늘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보라! 독수리가 대기를 헤치면서 커다란 원(Kreise)을 그리고 있으며, 그 목에는 뱀이, 잡힌 물건으로서가 아니라 다정한 벗으로서 고리처럼 감겨 있다.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에서…
(정오의 ‘순간’에 태양은 상승과 하강, 오전과 오후가 교차한다. 모든 이분법적인 것들이 하나로 맞물리는 지점이다. 그리고 커다란 원을 그리는 독수리와 고리처럼 감겨 있는 뱀은 바로 ‘영원회귀’의 상징이다.)
독자 분들에게 한 마디:
데미안 해설 시리즈 이후 이사 등 여러가지 개인적인 이유로 한동안 글을 올리지 못했는데 제 글을 기다려주시는 분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댓글 외에도 쪽지로 따로 연락을 주신 분들도 계셔서 화들짝 놀라기도 했고, 죄송한 마음이 들더라구요. 그래서 약속을 지키기 위해 포스팅을 올립니다.
최근 출판을 목적으로 제가 살면서 깨달은 신비주의적 지식들을 글로 정리하는 작업을 시작했는데요. 브런치에 매주 올리기는 어렵겠지만, 조금씩 공개할테니 가끔씩 찾아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보잘 것 없는 저의 글을 좋아해주시고, 기다려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이동수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