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의 시작
한동안 싱클레어는 평화로운 일상을 누린다. 그는 더 이상 표적을 가진 이들과 함께이지 않았으며, 에바 부인과 자주 둘만의 시간을 보낸다. 여기서 에바 부인과 자주 둘만의 시간을 가졌다는 것은, 다른 어떤 방해 없이 오롯이 신성과 동행하는 삶을 보냈음을 의미한다.
싱클레어는 마치 꿈을 꾸듯, 혹은 요술에 걸린 듯 한 단계 높은 의식차원에서의 인류 공동체가 탄생할 것임을 직감하고 있었다. 비록 그에게는 같은 표적을 가진 친구들이 생겼지만, 그는 아직 아무것에도 도달하지 못했고, 달라진 것은 없었다.
이에 싱클레어는 방 한가운데 서서 에바 부인을 부르는 일에 모든 의식을 집중하기 시작한다. 그러자 서서히 힘이 빠져나가며 그의 모든 에너지가 단단하고도 긴밀하게 한 데 모이더니 마침내 심장에 수정 한 덩이를 지닌 것처럼 밝게 빛나기 시작함을 느꼈다. 곧 그는 그것이 자신의 '자아'임을 깨닫게 되는데, 이는 흔히 불교에서 일컫는 견성(見性) 또는 견오(見悟)의 사건이었다.
힌두교에는 차크라(chakra)라는 용어가 있다. 아마 요가를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아마 익숙한 단어일 것이다. 차크라는 우리 인간의 육체와 정신을 구성하는 힘의 구심점들을 뜻하는데 이론마다 약 4~7개의 가장 중요한 차크라가 있다고 여겨진다.
이 차크라들 중 척추의 기저부에 위치한 물라다나 차크라에는 쿤달리니라는 신성한 여신의 에너지가 있는데, 힌두교나 불교에서는 고된 노력 끝에 이 쿤달리니가 활성화되는 순간, 영적인 각성 또는 해방을 경험할 수 있다고 전해진다. 싱클레어가 모든 의식을 모아 에바 부인에게 집중했다고 하는 장면의 의미는 결국 '쿤달리니 각성'을 통해 만물의 어머니인 '소피아(sophia)' 또는 '이시스(isis)', 즉 소설 속 '에바 부인'과의 합일을 통해 영적인 각성을 이루어내는 것을 의미한다.
싱클레어가 마침내 에바 부인을 불러내는 데 성공하자 누군가가 말을 타고 다가오고 있음을 느낀다. 데미안이었다. 에바 부인으로 상징되는 신은 자신의 대리인이자 '성자(聖子)' 데미안을 메시아로서 싱클레어에게 보낸 것이었다.
곧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큰 전쟁이 임박했음을 알린다. 작품의 시대적 배경 때문에 데미안이 언급하는 전쟁이 제1차 세계대전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이 많겠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해석일 뿐, 실제로는 물질주의의 파괴를 뜻하는 '영적 전쟁'에 대한 상징적 의미로 보아야 한다.
은회색 제복을 입은 데미안은 대위 계급을 달고 이 전쟁의 선봉장으로 참가한다. 이후 싱클레어도 전쟁에 참여하게 되는데 수많은 젊은이들이 전쟁터로 향하는 기차에 오르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때 싱클레어는 놀랍게도 그들의 얼굴에서 자신의 것과 같은 '표적'을 발견하게 된다.
그동안 인간들을 과소평가해 온 싱클레어는 평소 별생각 없어 보였던 사람들이 죽음을 불사하며 자신의 운명에 눈부시도록 순응하는 사건을 보며 감격한다. 우주는 많은 영혼들이 새로 태어날 수 있도록 광분하여 죽이고, 말살하며 영혼을 발산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의 깊은 곳에는 근원적인 파괴와 창조가 꿈틀대고 있었으며, 거대한 새가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하고 있었다. 알은 세계였으며, 낡은 세계는 새로운 세계 질서(New World Order)를 위해 짓부숴져야만 했다.
요동치는 전장에서 싱클레어는 하늘을 응시한다. 그리고 수많은 포탄들 사이에서 하나의 환영을 본다. 에바 부인을 닮은 여신이 눈을 감고, 얼굴을 고통으로 일그러뜨리더니 출산하듯 별들을 발산하는 모습이었다. 그 별들 중 하나가 큰 소리를 내며 날아와 싱클레어에게 부딪히게 되고, 이후 싱클레어는 땅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진 채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발견된다.
이 장면 속에는 아주 교묘하게 성경 속 요한계시록의 상징이 녹아있다. 요한계시록 12장에는 싱클레어가 본 여신의 환영과 비슷한 내용이 묘사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다.
1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옷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 아래에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관을 썼더라
2 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를 쓰며 부르짖더라
3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왕관이 있는데
4 그 꼬리가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5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출산하려는 여자와 용, 그리고 아들의 내러티브에서 여자는 '영성(靈性)'을, 용은 '물성(物性)' 상징하며 대비를 이루고 있다. 이때 탄생하는 아들은 메시아 즉, 한 세상을 다스릴 데미우르고스이자 카인의 아들인 '데미안'을 의미하는데 여신의 별이 싱클레어를 지목해 때리는 장면을 통해 곧 싱클레어가 데미안과 동등한 에소테릭(esoteric) 비전(秘傳)의 후계자임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또 한 가지 떠오르는 장면은 프리메이슨의 아버지로 불리는 '히람 아비프(Hiram Abiff)'가 머리에 망치를 맞고 살해당한 뒤 피투성이로 발견되는 신(scene)인데, 이 또한 한 명의 위대한 마스터가 탄생하는 내러티브를 그리고 있다. 머리에 별을 맞고, 쓰러져 만신창이로 발견되는 싱클레어의 모습이 히람 아비프의 모습과 오버랩 된다.
들것에 실려 상처투성이인 채로 이동한 싱클레어의 옆에는 다른 매트리스가 바싹 붙어 있었고, 그 위에는 표적을 달고 있는 누군가가 누워 있었다. 데미안이었다.
데미안은 무한히 긴 시간 동안 싱클레어를 응시하며 나직이 말한다.
"싱클레어, 어린 소년이 됐네!"
여기서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어린 소년이 되었다는 것은 니체가 말한 깨달음의 3단계(낙타, 사자, 어린아이) 중 마지막 단계를 이루어냈음을 인정하는 내용이다.
"프란츠 크로머 아직도 기억하니?"
어린 시절 이후로 단 한 번도 크로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던 싱클레어와 데미안이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크로머' 즉, 모든 것의 시작인 '원죄'의 메타포를 떠올리는 이 장면은 얼마나 놀랍도록 감격스러운가. 이는 마치 위대한 교향곡의 1악장에서 제시된 모티브가 4악장의 절정에서 등장하는 것처럼 나를 정녕 소름 돋게 만드는 부분이었다.
데미안은 이어서 말한다.
"꼬마 싱클레어, 잘 들어. 나는 떠날 거야. 너는 어쩌면 다시 한번 나를 필요로 할 거야. 크로머에 맞서든 그 밖에 다른 일이든. 그럴 때 네가 나를 부르면 이제 나는 그렇게 거칠게 말을 타거나 기차를 타고 달려오지 못해. 넌 네 자신 안으로 귀 기울여야 해. 그러면 알아차릴 거야. 내가 네 안에 있다는 걸. 그리고 에바 부인이 말했어. 네가 언젠가 잘 지내지 못하면 나더러 네게 당신의 키스를 해 달라고. 나에게 보내준 키스를... 눈을 감아, 싱클레어."
데미안으로부터의 가벼운 입맞춤에 싱클레어는 잠이 들었으나, 이후 잠이 깼을 때 그의 곁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사람이 누워있었다. 세상은 여전히 불완전하고, 고통 속에 있었으나 싱클레어는 깨닫는다. 자신의 친구이자 인도자였던 데미안과 자신이 완전히 닮아 있음을.
마치 십자가 형 이후 붕대에 감겨 있던 예수처럼 그렇게 싱클레어는 붕대를 감게 되고, 각성한 성자(聖子)의 위대한 부활을 암시하며 그렇게 이 마법 같은 소설은 끝난다.
이동수
이 모든 것은 다만 표면이었다. 이 깊은 곳에서는 무언가가 생성되고 있었다. 새로운 인간성 같은 무엇이.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었으며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바로 내 곁에서 죽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미움과 분노, 살육과 말살이 대상에 매여 있지 않다는 통찰이 느껴졌다. 아니다. 대상들은 목표들과 마찬가지로 완전히 우연이었다. 근원적인 느낌, 가장 거친 느낌들도 적에게 향해 있지 않았다.
그들의 유혈의 위업은 오로지 내면의, 그 자체 안에서 산산이 파열된 영혼의 발산이었다. 새로 태어날 수 있도록 광분하여 죽이고, 말살하고, 죽으려는 영혼의 발산이었다. 거대한 새가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하고 있었다. 알은 세계였고 세계는 짓부서져야 했다.
- 데미안 '종말의 시작' 中
그동안 에소테릭(esoteric) 신비주의, 영지주의에 입각해 해설한 데미안 시리즈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사 관계로 한 주 쉬고, 2주 후 부터 새로운 내용으로 찾아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