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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수 Aug 12. 2024

데미안 #7

야곱의 싸움

데미안과 떨어져 있는 동안 싱클레어는 우연히 알게 된 오르간 연주자 피스토리우스로부터 많은 가르침을 받는다. 싱클레어는 피스토리우스로부터 아브락삭스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조로아스터교의 배화의식이라던가 육체와 아스트랄체의 분리, 그리고 힌두교의 옴(om)을 말하는 법 등 여러 가지 신비로운 지식에 대해 배운다.


여기서 잠깐. 싱클레어에게 많은 가르침을 전수해 준 피스토리우스는 누구일까. 소설 속에서 그는 목사 아버지를 둔 신학도이자, 목사 후보생이었다는 설정으로 나오는데, 사실 피스토리우스라는 캐릭터는 '데미안'의 작가인 '헤르만 헤세'의 표상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헤르만 헤세야말로 목사 아버지를 둔 신학도이자, 목사 후보생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헤세의 가정은 전통적인 경건주의 기독교 집안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목사였으며, 어머니는 목사의 딸이었다. 배경이 이렇다 보니 헤세는 목사의 길을 걷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분위기 속에서 자랐는데, 소설 데미안의 첫 장에 등장하는 엄숙하고 경건한 '아버지의 세계'는 실제로 그가 어린 시절 경험한 '아버지의 세계'를 묘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열네 살이 된 헤세는 마울브론 신학교(경건주의 기독교 기숙학교)에 입학하게 되지만, 그곳의 엄격한 규율과 복종, 지루한 암기 등은 그의 고귀한 영혼에 폭력과도 같은 것이었다. 인도 선교사 출신이었던 아버지와 불교 연구의 권위자였던 외삼촌의 영향을 받아 불교와 동양철학에도 관심이 많았던 그는, 결국 신학교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학교에서 도망치게 되는 지경에 이른다.


헤세가 다녔던 마울브론 신학교 및 수도원의 전경


헤세가 다녔던 마울브론 신학교 및 수도원의 내부


질풍노도의 청소년기에 학교를 거부하고, 신경쇠약까지 겪은 헤세는 시인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한동안 시 쓰기에만 몰두한다. 이후 짝사랑의 고민 끝에 자살 시도까지 할 정도로 상황이 심각해지자 그의 아버지는 결국 헤세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키게 된다. 퇴원 후 헤세는 시계 수습공과 서점 점원으로 잠시 일한 뒤, 글쓰기를 시작하면서 점차 마음의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피스토리우스라는 캐릭터와 관련해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실제 독일에는 요하네스 피스토리우스(Johannes Pistorius)라는 이름을 가진 유명 신학자가 두 명 있었는데, 요하네스 피스토리우스 디 엘더(Johannes Pistorius the Elder)라 불렸던 아버지와, 요하네스 피스토리우스 디 영거(Johannes Pistorius the Younger)라 불린 아들이 바로 그들이다.


아버지 피스토리우스는 마틴 루터의 영향을 받아 독일 정통 개신교계를 대표하는 목사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의 아들이었던 피스토리우스 영거의 경우, 유대교 신비주의 전통인 카발라(Kabbalah)에 매료되어 이 분야의 중요한 문헌들을 수집하고 연구하는데 몰두했다. 이 연구의 결과로 그는 1587년에 "Artis Cabbalisticae, hoc est reconditae theologiae et philosophiae Scriptorum Tomus I(카발라의 예술, 즉 은밀한 신학과 철학의 저술 모음 제1권)"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했는데, 이 책은 카발라의 개념을 기독교 신비주의와 결합하려는 시도였다.


이후 그는 정통 개신교도였던 아버지와 달리 가톨릭으로 개종하였으며, 실낙원(Paradise Lost)의 저자인 존 밀턴(John Milton)이 카발라를 이해하는 데에 큰 영향을 미쳤다. 비록 그가 몸 담았던 가톨릭 교회의 반대로 인해 '카발라의 예술 제2권'은 발표되지 못했으나, 그의 작업은 후대 신학자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1587년에 발행된 요하네스 피스토리우스 作 '카발라의 예술'


이러한 일련의 상황들을 종합해 보면, '데미안'에 등장하는 피스토리우스라는 인물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신학적 전통에서 벗어나 세상의 다양한 영적 지식을 탐구해 온 구도자를 상징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피스토리우스는 끝내 자신의 배움을 완전히 체화(體化) 하지 못해 지식의 틀에 갇힌 채, 장인(master)이 되지 못하고 숙련공(craft) 수준에 머무르고 만다. 이는 지식은 쌓았으나 그것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지 못한 비전(秘傳) 전승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어쩌면 헤세는 마치 영화 ‘매트릭스’ 속에서 미스터 앤더슨을 네오(the One)로 인도하는 모피어스와도 같이, 아직 완전한 깨달음을 얻지 못한 구도자로서의 자신을 피스토리우스에 투영함으로써, 싱클레어라는 수많은 자아들의 안내자 역할을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어느 날, 피스토리우스는 싱클레어에게 성경 속 야곱과 천사의 싸움 이야기를 들려준다. 구약성경에는 아브라함의 손자였던 야곱이 등장하는데, 그는 매우 의지가 강한 인물의 표상이다. 야곱은 형의 축복을 가로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으며,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하기 위해 삼촌 밑에서 14년 동안 노예 생활을 마다하지 않았다. 긴 인고의 시간 끝에 결혼하고, 부자가 되어 귀향하던 중, 야곱은 갑자기 나타난 천사 혹은 하나님인 존재와 씨름을 벌인다. 야곱은 자신을 축복하지 않으면 놓아주지 않겠다며 끝까지 버티고, 결국 천사로부터 기어이 축복을 받아내고야 만다.


Gustave Doré 作, Jacob Wrestling with the Angel (1855)


피스토리우스가 지식의 습득에만 몰두했던 것과 달리 싱클레어는 자기 자신에게 침잠하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것은 여자였다가 남자였으며, 소녀이자 어린아이였다. 어머니임과 동시에 창녀였고, 동물이면서 사람이었다. 마치 야곱이 신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던 것처럼, 싱클레어는 더 높은 의식적 상승을 위해 마음속 소망의 상을 붙들고 간절히 기도한다.  


그러다 그는 문득 깨닫는다. 시를 쓰거나, 피스토리우스처럼 설교를 하거나, 그림을 그리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 아님을. 그 모든 것은 부수적으로 생성된 것일 뿐, 그가 광인이 되거나 범죄자가 된다 한들 상관없는 일이었다. 예수 옆에 매달렸던 도둑 중 회개하지 않은 도둑이야말로 도둑으로서 완성된 삶을 살지 않았던가. 결국 자신의 운명을 자신 속에서, 완전히 그리고 굴절 없이 다 살아내는 것 만이 숙명처럼 느껴졌다.


드디어 싱클레어는 데미안과 피스토리우스를 거쳐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길을 찾기 시작한다. 싱클레어는 처음으로 자신에게서 '카인의 표적'을 느낀다. 입문자(Entered Apprentice)였던 그가, 숙련공(Fellow Craft) 단계를 거쳐, 이제 장인(Master)에 이르는 여정이 펼쳐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동수






우리가 보는 사물들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것과 똑같은 사물들이지. 우리가 우리 마음속에 가지고 있지 않은 현실이란 없어.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토록 비현실적으로 사는 거지. 그들이 바깥에 있는 물상들만 현실로 생각해서 마음속에 있는 그들 자신의 세계가 전혀 발언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야. 그러면서 행복할 수는 있겠지. 그러나 일단 다른 것을 알면 그때부터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는 길을 가겠다는 선택이란 없어져 버리지. 싱클레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는 길은 쉬워. 우리의 길은 어렵고. 우리 함께 가 보세.

- 데미안 '야곱의 싸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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