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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수 Aug 19. 2024

데미안 #8

에바 부인 (1)

싱클레어는 우연히 데미안의 어머니 사진을 보게 되고, 그녀야말로 그동안 꿈속에서 보았던 운명의 여상(女像) 임을 직감한다. 그녀는 키가 크고 거의 남자 같은 여성의 모습이었으며, 아들이자 어머니이면서, 창녀이자 성녀와도 같이 세상의 모든 극성(極性)을 품고 있는 존재였다.


몇 주 뒤, 그는 대학에서 철학 수업을 듣게 되는데 젊은이들이 교실에서 텅 빈 기성품과 같은 철학을 하고 있음에 실망을 느끼고, 교외의 오래된 낡은 집에서 니체를 탐독하며 지낸다. 이 무렵 싱클레어는 니체의 영혼이 지닌 고독과 진한 공명을 하게 된다.


왜 하필 니체였을까. 그것은 니체가 물질적인 세상의 범주를 초극한 초인(superman) 사상을 제시한 철학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저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는 낙타에서 사자로, 사자에서 어린아이 단계로 가는 구도자의 길을 제시하는데, 이는 작품 '데미안' 속 싱클레어의 영적 성장기와도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어느 날 늦은 저녁 한가로이 시내를 걷던 싱클레어의 눈앞에 익숙한 행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데미안이었다. 데미안은 싱클레어가 '카인의 후예'임을 나타내는 표적을 여전히 가지고 있음을 알아보고 반가워한다.


둘은 오랜만에 만나 지나간 학창 시절을 회상하지만, 두 사람을 이어준 계기가 된 불량배 크로머에 대한 이야기는 이때에도 나누지 않는다. 이전에 이미 설명했듯이, 크로머는 우리 인류의 '원죄'를 표상하는데, '카인의 후예'끼리는 더 이상 원죄의 문제 따위에 속박당하지 않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데미안은 시대의 징표에 대해 깊고 무거운 말을 건넨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되어 있지만 아마도 이 장에서의 시대적 배경은 파시즘이 온 유럽을 삼키고 전운이 감돌기 시작하던 무렵이었을 것이다. 그는 모두가 패거리를 짓는데 혈안이 되어 있지만, 이는 두렵고 무서운 이들의 서로에 대한 도피일 뿐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과 하나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불안한 거라고. 단 한 번도 자신을 알았던 적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불안한 거라고. 


카인이 두려워 똘똘 뭉치려 했던 자들을 기억하는가. 인류 최초의 살인자라 낙인찍혔던 카인이야말로 그 누구보다 주어진 운명을 살아낸 인물이었지만, 낡은 이상(理想)에 얽매인 무지한 사람들은 지루하기 짝이 없는 낙원에서 나와 광야를 헤매며 최초로 도시를 건설한 카인의 창조력을 두려워하며 돌을 던졌다. 이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도 크게 다르지 않은 점이다.


엑소테리시즘(exotericism)은 절대다수의 피지배 계층이 가진 사상을,

에소테리시즘(esotericism)은 창조 능력을 손에 넣은 소수의 지배 계층이 가진 사상이다.


데미안은 말한다. 싸움이 있을 거라고. 이는 만연한 물질주의의 맹목적 신봉자들, 즉 이렇다 할 삶의 목적도 없이 채 인간이 되지 못한 개구리와 도마뱀 같은 절대다수의 대중들과, 비전(秘傳)에 눈을 뜬 이들의 영적세계 간의 싸움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는 우리 인류의 의지가 결코 공동체나 국가와 민족 따위에 있지 않다는 것을 모두가 알게 될 것이며, 그것은 우리 개개인 속에만 적혀 있다고 했다. 엑소테릭(exoteric)의 낡은 질서가 파괴되고, 언젠가는 참된 인류의 의지만이 오롯이 남아 에소테릭(esoteric)의 신세계 질서(New World Order)가 도래할 것에 대한 장대한 예언이었다. 


데미안과 헤어진 다음날, 싱클레어는 데미안의 집으로 향한다. 그 집의 현관 주위에는 한 때 싱클레어가 그려 데미안에게 보냈던 알을 깨고 나오는 새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그는 자신의 그림을 보며, 지금까지 그가 겪어 온 모든 혼란의 과정들을 처음으로 긍정하고 시인하게 된다. 견성(見性)의 순간이었다.


그때, 싱클레어는 새 그림 아래 열린 문에서 짙은 색 옷을 입은 여성을 발견한다. 데미안의 어머니이자 그토록 꿈에 그리던 구원의 여상(女像) 에바 부인이었다. 그동안 데미안의 인도를 받아 성장해 온 싱클레어가 베아트리체와 피스토리우스의 시절을 겪으며, 마침내 그녀를 만나는 길에 이른 것이었다.


이 시점에서 헤세의 '데미안'이 영지주의적 놀라운 상징들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모르고 문자 그대로만 읽으면 도대체 싱클레어가 왜 친구의 엄마를 사랑하게 되는지에 대해 이상한 해석을 하게 된다.


여기서 에바 부인의 에바(Eva)는 인류 최초의 여성인 이브(Eve)의 독일식 표현이다. 에바(Eva)는 단순히 인류 최초의 여성을 의미한다기보다 지난번 아브락삭스에 관한 이야기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영지주의(gnosticism)에서의 최초의 분리된 여성형 신성, 즉 플레로마(pleroma)로서의 소피아(Sophia)를 의미한다고 이해해야 정확하다.


영지주의(gnosticism)에서의 소피아(Sophia) 개념은 유대교 비전(秘傳)인 카발라(Kabbalah)에서의 아인 소프(Ain Soph) 개념과 같다고 볼 수 있는데, 절대 신성의 충만한 상태, 즉 플레로마(pleroma) 상태를 일컫는다. 이는 결국 싱클레어가 자신에게 내재되어 있던 신성과 조우하는 단계에 이르렀음을 알려주는 신호다.


유대교 전승 카발라에서의 13 아이온에 대한 설명


마치 야훼가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로 등장하듯, 신성한 여성성의 상징인 소피아(Sophia)는 이집트 신화에서 이시스(Isis) 여신으로 등장하게 되고, 여기서 과부의 아들로 태어난 호루스(Horus)가 곧 카인의 후예인 데미안과 맥을 같이 하게 된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소설 '데미안'에 자주 등장하는 매(새)에 관한 이야기는 결국 모두 호루스(Horus)의 상징으로 보아야 한다.


이후 싱클레어는 데미안의 집을 제 집처럼 여기며, 수많은 에소테릭(esoteric) 비전(秘傳) 전승자들을 만난다. 그곳에는 천문학자와 카발라 연구가, 불교도, 요기 등이 있었으며, 싱클레어는 이곳에서 '표적'을 지닌 사람들의 비밀을 전수받게 되면서 진정한 이니시에이션(initiation)을 체험하게 된다.


(다음 주에 에바 부인 2편으로 돌아옵니다...)



이동수




미래에 어떤 모습을 줄지 근심하는 것은 우리 표적을 지닌 사람들의 책임이 아니었다. 우리가 보기에는 어떤 종교든지, 어떤 구원론이든지 애초부터 죽어 있고 무익했다. 우리가 의무이자 운명이라고 느끼는 것은 오로지 이런 것이었다. 불확실한 미래가, 그것이 가져올 어떤 것에나 우리가 준비되어 있음을 발견할 만큼 우리 누구든 그토록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고, 기꺼이 자기 속에서 작용하는 자연의 싹의 요구에 완전히 따르며 살리라는 것. 

- 데미안 '에바 부인'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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