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바 부인 (2)
소설 속에서 에바 부인은 에소테릭(esoteric) 비의(秘儀)에 귀의한 이들의 대모로 묘사된다. 데미안과 싱클레어처럼 표적을 지닌 이들은 인류의 영적인 길에 영향을 미친 사람들이었으며, 완전한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을 인생에 최우선 과제로 삼은 구도자들이었다.
개인적으로'데미안'에 등장하는 에바 부인의 캐릭터를 통해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과거 수많은 영적 지도자들의 대모 역할을 했던 헬레나 페트로브나 블라바츠키(1831-1891)다.
헬레나 블라바츠키는 신지학회(神智學會, Theosophical Society)라는 단체의 설립자이자, 19세기의 글로벌 영적 지도자였다. 그녀는 1831년 러시아 출생으로, 어린 시절부터 영혼과 소통하거나 비전(vision)을 보는 등 초자연적인 영적 현상을 강하게 경험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경험들은 그녀의 오컬트적 성향을 강화시켰으며, 그녀가 훗날 전 세계를 여행하며 다양한 종교와 철학 체계를 연구하게 만든 원동력이 되었다.
블라바츠키는 중동, 유럽, 아시아 등지에서 여러 오컬트 전통과 종교적 관습을 연구했는데, 특히 인도와 티베트에서의 경험이 그녀의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티베트의 동굴에서 숨겨진 지혜를 가진 영적 스승들(그녀는 이들을 '마스터' 혹은 '마하트마'라고 불렀음)과 접촉했다고 하며, 이러한 경험은 그녀가 신지학 사상의 기초를 형성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73년, 블라바츠키는 미국 뉴욕에 정착해 그곳에서 언론인 헨리 스틸 올콧(Henry Steel Olcott)과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은 영적 사상에 대한 공통된 관심사를 발견하고, 1875년에 신지학회를 공동 설립하기에 이른다.
신지학회의 목표는 세계의 다양한 종교와 철학을 통합하여 인간의 영적 진화를 촉진하는 것이었으며, 신지학회는 세 가지 기본 목표를 내세웠는데 그것들은 아래와 같다.
인류의 우애(友愛)는 피부 색깔, 성별에 구애받지 않고 누구나 평등하다.
비교 종교의 성립, 철학의 심도 있는 연구를 촉진시키며 인간의 복지 실현을 위해 기여를 한다.
인간의 수많은 잠재력을 발굴하여 최대한 발휘할 수 있게끔 노력하고 구명한다.
블라바츠키는 1877년, 첫 번째 주요 저서인 '베일을 벗은 이시스'(Isis Unveiled)를 출간하게 된다. 이 책은 과학, 종교, 철학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신지학적 세계관을 설명해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책에서 그녀는 인간의 영혼 불멸, 윤회, 그리고 카르마의 법칙을 설명하며, 다양한 종교와 신비주의 전통을 통합하여 하나의 일관된 체계로 제시한다.
블라바츠키는 이 책을 통해 고대의 지혜와 영적 진리를 현대에 되살리고자 했다. 그녀는 인류의 고대 문명이 현대보다 더 높은 수준의 영적 지혜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 지혜가 시간이 지나면서 왜곡되고 잊혔다고 말한다.
책의 첫 번째 권에서 그녀는 당시 19세기의 과학이 물질세계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더 높은 차원의 영적 또는 비물질적 세계를 무시한다고 비판한다. 21세기의 현대 사회에도 여전히 적용되는 지적이다. 그녀는 인류의 고대 문명들이 현대 과학은 이해하지 못하는 고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우리가 잊어버린 지식들이야말로 인류가 직면한 많은 문제에 대한 답을 줄 수 있다고 믿었다. 이 책을 통해 그녀는 고대 이집트, 인도, 티베트, 그리스 등에서 전해 내려오는 지혜와 신비주의적 전통을 통해 과학이 무시하거나 부정해 온 영적 현상들을 소개하고 있다.
책의 두 번째 권은 종교와 신학을 다루며, 기독교를 포함한 여러 종교의 교리와 역사를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블라바츠키는 특히 기독교의 교리가 원래의 순수한 영적 진리에서 얼마나 왜곡되었는지를 강조하고 있는데 기독교의 많은 교리와 전통이 고대의 이교적 종교들에서 차용된 것이며, 시간이 지나면서 본래의 의미가 변질되었음을 밝힌다. 특히 여러 조직화된 종교들(exoteric 대중 종교)의 경우, 지금까지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목적을 위해 영적 진리를 왜곡해 왔으며, 진정한 영적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이러한 왜곡된 교리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고대의 신비주의 전통이 현대 종교들보다 더 순수하고 깊은 영적 진리를 담고 있기 때문에 우리 인류가 고대의 지혜를 다시금 탐구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또한, 블라바츠키는 다양한 종교들 간의 공통점을 예로 들며 모든 종교의 근본에는 동일한 영적 진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 영적 진리가 시간이 지나며 왜곡되어 왔기 때문에 신지학을 통해 이 진리를 회복해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1879년에 인도로 건너간 블라바츠키는 신지학회의 본부를 마드라스(현재의 첸나이)에 설립했다. 그녀는 인도의 영적 스승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신지학적 가르침을 전파했으며, 인도의 종교 및 철학 전통을 서구에 소개하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시 신지학회의 회원으로 활동했던 유명인 중에는 인도의 성자 마하트마 간디, 아일랜드의 시인 W.B. 예이츠,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 인류학의 창시자인 루돌프 슈타이너 등이 있다.
1888년에 블라바츠키는 또 다른 주요 저서인 '비밀교리'(The Secret Doctrine)를 출간했는데 이 책에서 그녀는 인간이 영적 진화를 통해 궁극적으로 신성한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헬레나 블라바츠키에 대해서는 많은 비판 역시 존재하지만, 그녀가 지금까지 인류의 영성에 끼친 영향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특히 고대의 지혜가 현대의 뉴에이지 사상으로 이어지는 데에 있어 블라바츠키는 정말이지 지대한 공헌을 했다. 나 또한 지나치게 물질적인 현대 사회가 더 높은 차원에서의 인류의 영성 문제를 무시하고 있다는 그녀의 의견에 동의하며, 고대의 신비주의 전통이야말로 지금 보다 더 순수하고 깊은 영적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 인류가 고대의 지혜를 회복하기를 바라고 있다.
'데미안'에서 에바 부인은 싱클레어에게 조용히 속삭인다. '당신의 꿈은 완전치 않아요. 싱클레어, 당신은 최상의 것을 잊어버렸어요.'라고.
지금 우리는 무엇을 잊어버리고 있는가. 불과 두 세기 전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자아실현이라던가 영적 각성, 우주의 진리와도 같은 주제에 진지하게 매달렸었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지금 무엇에 매달리고 있는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 물질적인 가치에 지나치게 집착하면서, 영적 진리와 삶의 본질에 대한 탐구를 외면하고 있다. 과연 돈, 권력, 명예와 같은 외적 성공의 가치들이 우리의 삶에 진정한 의미를 제공해 줄 수 있을까?
이러한 세태는 우리의 내면을 빈곤하게 만든다. 언제부터인가 인간은 더 이상 스스로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나는 누구인가?", "내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어떻게 해야 진정한 평화와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와 같은 질문들은 그저 물질적 성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깡그리 잊히고 있다.
과거에는 인류가 진리와 지혜를 탐구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철학자, 종교인, 예술가들 모두가 이러한 탐구의 길을 걸으며 인류의 영적 발전을 이끌어왔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 우리는 이러한 전통을 경시하고, 인간 본연의 영적 필요를 억압하며, 우리를 더 큰 혼란과 불안 속으로 몰아넣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볼 일이다.
우리에게는 다시금 영적 진리와 삶의 본질을 탐구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외적 성공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때, 우리는 진정한 자신과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우리 인간은 물질적 존재이면서도 동시에 영적 존재임을 잊지 말자. 이 두 측면의 균형을 찾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정한 길이다.
그러라고 우리에겐 표적이 찍혀 있어. 무서움과 증오를 일으켜 당시의 인류를 그 옹색한 목가적 생활로부터 끌어내 위험하게 넓은 곳으로 몰아가도록 카인에게 표적이 찍혀 있었던 것처럼 말이야. 인류가 가는 길에 영향력을 발휘한 사람들은 모두 하나같이 그들에게 닥친 운명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었기 때문에, 오로지 그 때문에 능력을 발휘하고 영향을 미칠 수 있었어. 그것은 모세와 부처에게도 적용되고, 나폴레옹과 비스마르크에게도 적용되지. 어떤 흐름에 봉사하느냐, 어떤 극(極)의 다스림을 받느냐 하는 것은 자신이 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 데미안 '에바 부인'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