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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수 Aug 15. 2020

나는 살기 위해 죽으리라

말러 교향곡 제2번 '부활'

유학 시절의 일이다. 하루 종일 집에 갇혀 있다 보니 답답함이 느껴졌다. 어디든 나가고 싶어져 잠시 고민하다가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예술작품들을 만나기 위해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으로 향했다. 그런데 하필 그날따라 전철에서 잘못 내리는 바람에 센트럴파크를 가로질러 한참을 걸어가야 하는 상황이 생겨버린 거다.


싸늘하게 얼어붙어 있던 한겨울의 센트럴파크. 칼바람이 부는 끔찍한 추위를 잊고자 귀에 꽂은 이어폰에선 마침 레너드 번스타인이 연주한 말러의 2번 교향곡 ‘부활’의 5악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렇게 음악에만 의지한 채 냉랭하기만 한 공원을 걸어간 지 얼마나 지났을까. 


당시의 센트럴파크는 이런 느낌의 풍경이었다


말러에 입문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라 이전까지는 마냥 어렵기만 하고 장대하게만 들렸던 이 곡이 마치 신내림처럼 가슴에 ‘팍’하고 꽂히는 순간이 찾아왔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왈칵왈칵 쏟아질 것만 같고, 가슴이 폭발해 버릴 것 같던 그때의 감동을 글로 전한다는 건 아무리 노력해 봐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날 나는 말러를 통해 베토벤의 심포니와는 또 다른 형태의 엄청난 음악적 전율을 느낄 수 있었다. 미국의 지휘자 길버트 카플란이 이 곡을 처음 들었던 날 몸에 백만 볼트짜리 전류가 흐르는 듯했다더니 그 말의 의미를 그제야 비로소 절감했다.


창피한 줄도 모르고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센트럴파크를 정신 나간 사람 마냥 반쯤 흐느끼며 한참을 걸었다. 얼굴은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채로 목적지였던 메트로폴리탄에 겨우 도착한 그 순간. 황당하게도 나를 반겨준 것은 월요일 정기휴관을 위해 굳게 닫혀 있던 박물관의 커다란 입구였다. 하는 수 없이 나는 다시 집으로 발걸음을 옮겨야만 했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그 겨울 한참을 걸어 겨우 도착했던 박물관의 문이 굳게 닫혀 있었기 때문에 그날 내가 만난 ‘부활’의 감동이 몇 배나 크게 남았다고 하면 당신은 나를 이해할 수 있을까.


살다 보면 삶은 가끔씩 명확한 엇갈림을 통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전달할 때가 있다. 사람들은 종종 인생이 허무하다고 한숨짓기도 하고, 때로 막다른 벽에 부딪힐 때마다 인생이 우리를 기만한다며 괴로워하기도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들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만들 때가 많다는 거다.


늘 다니던 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하필 그날따라 전철에서 잘못 내렸는지도 의문이다. 박물관의 문이 굳게 닫혀 있으리라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 차갑게 얼어붙은 센트럴파크를 계속해서 걸어가는 동안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눈물을 쏟으며 오롯이 만날 수 있었던 음악. 아니, 그렇게 온전히 만나야만 했던 음악. 내게 말러의 ‘부활’은 그런 곡으로 남았다.


인간은 자기가 싸우고 있는 이 삶의 끝에 최종적으로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늘 망각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죽음이란 마치 월요일이면 닫히는 박물관의 문처럼 누구에게나 똑같이 정해진 운명과도 같은 것. 만약 그날 박물관의 문이 굳게 닫혀 있지 않았더라면 길 한복판에서 말러를 통해 느낀 감동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수많은 다른 예술작품들을 접했을 것이고, 그랬다면 아마도 말러의 음악이 내게 선물해준 아름다움의 무게가 조금 더 가벼워졌거나 쉽게 잊혔을는지 모른다.


만약 우리의 인생이 지금처럼 짧지 않거나 혹은 인간에게 죽음과도 같은 커다란 벽이 없다고 한다면 과연 삶은 지금보다 아름다울 수 있을까. 우리 모두는 어쩌면 지금도 '죽기 위해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구스타프 말러는 이미 백여 년 전에 죽었지만 그는 지금도 그의 심포니 2번 5악장의 가사를 통해 ‘나는 살기 위해 죽으리라!’며 소리친다. 삶의 최종 결과물인 '죽음'이 오히려 ‘생’에의 강한 동기(motivation)가 되고 마는 이 놀라운 의식구조의 전환은 그동안 자신의 삶을 지배해 온 모든 고난과 역경의 힘을 단숨에 에로스적(‘生’에의 동경)인 에너지로 바꾸어 버리고 마는데 이는 마치 헤르만 헤세가 그의 소설 '데미안'을 통해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고 설파한 진리와도 일맥상통한다.


이제껏 타성에 젖어 살아온 인생이 각성하게 되는 순간이란 어쩌면 죽음을 향한 브레이크 없는 질주와도 같은 삶을 살고 있던 존재가 어느 날부터 기꺼이 죽음을 '위해’ 살고자 하는 의지를 가질 때에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 아닐까.


문 닫힌 박물관을 문 닫힌 줄 모르고 찾아가는 삶을 뛰어넘어 한 번쯤은 문 닫힌 박물관을 향해 일부러 걸어가는 삶을 살 수만 있다면. 그런 인생에서 우리는 말러의 2번 교향곡 외에 또 다른 어떤 보물들을 발견하게 될까.


궤변처럼 들리겠지만 ‘살기 위해서 죽으리라!’고 소리쳤던 말러처럼 우리를 둘러싼 인생의 아이러니를 온몸으로 안아 버리자. 어쩌면 그제야 비로소 우리의 인생이 온전히 우리의 것이 될지도 모른다.






Dein ist, ja dein, was du gesehnt!


Dein, was du geliebt,


Was du gestritten!


네가 갈망했던 모든 것, 네가 사랑해 온 모든 것,


네가 싸워온 모든 것이 온전히 네 것이다!



Was entstanden ist


Das muß vergehen!


Was vergangen, auferstehen!


Hör' auf zu beben!


Bereite dich zu leben!


창조된 것은 시들어야 하고,


시들어 버린 것은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더 이상 떨지 말고,


살아나기 위해 준비하라!



- Gustav Mahler, "부활" 中 



이동수



나의 추천 앨범/명연주


Barbara Hendricks (soprano), Christa Ludwig (contralto)

Leonard Bernstein (conductor)

New York Philharmonic

The Westminster Choir


녹음: 1987/04 Stereo, Digital

장소: New York, Avery Fisher Hall






말러의 2번 교향곡 ‘부활’의 명연을 남긴 지휘자로 오토 클렘페러, 주빈 메타, 클라우스 텐슈타트 같은 여러 인물들이 있긴 하지만 나의 경우 누가 뭐래도 말러는 번스타인의 연주를 듣는다. 간혹 몇몇 애호가들은 번스타인의 해석이 지나치게 주관적이고 과장되었다며 평가절하하기도 하는데 사실 레너드 번스타인만큼 말러 음악의 에센스를 제대로 이해했던 지휘자는 드물다.


나는 카라얀이 베토벤을 완벽하게 표현해 낸 것처럼 번스타인이야 말로 말러의 영혼을 완벽하게 표현해낸 유일한 지휘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말러에서 브루노 발터로 브루노 발터에서 레너드 번스타인으로 이어지는 뉴욕 필하모닉 상임 지휘자 계보는 하나의 적통이다.


만약 번스타인이 없었다면 지금의 말러 붐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그는 그의 스승인 브루노 발터보다도 우리 인류에게 말러의 음악을 소개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마치 예수를 전도한 사도 바울의 역할을 했다고 해야 할까. 레너드 번스타인은 말러 2번 교향곡의 녹음을 1953년, 1963년, 1973년, 1987년에 걸쳐 남겼는데 내가 한겨울 센트럴 파크를 걸으며 들었던 연주가 바로 1987년의 뉴욕필과 번스타인의 녹음이다. 정말 놀랍고 대단하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이 장엄하고도 드라마틱한 연주는 진심으로 인류의 귀한 유산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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