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 공경 문화가 주는 딜레마
어제 운동을 한 후, 지하철로 환승하기 위해 교대역으로 향했다. 그러나 막차에서 하차하는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고, 나는 택시를 탈 수밖에 없었다. 일요일 교대역 12시에는 왜 그리도 택시가 잡히지 않는지, 30분 가까이 돌아다녀야 했다. 마침 택시 한 대가 손님을 내려 주고 있기에 다행히 택시에 탈 수 있었다. 아니 탈 뻔했다.
내가 택시의 앞자리에 앉자마자 한 30m쯤 뒤에 있던 중년의 남성이 쫓아왔다. 그 중년의 남성은 화를 내며 횡설수설했는데 요는 이것이었다. 본인이 그 자리에서 20분 넘게 기다렸는데, 왜 나를 앞지르고 달려가서 택시를 타는 것이냐!!
그 중년의 남성은 분명 스마트폰으로 무언가를 하느라 내가 지나쳐 갈 때 나를 보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달려갔느니, 당신이 20분을 기다렸느니 성을 내었다.
나는 설명했다. 나는 30분을 기다렸다. 그리고 사실 몇 분을 기다렸는지는 여기서 중요한 것이 아니다. 택시를 그 자리에 서서 잡는 것과 돌아다니면서 잡는 것은 선택의 문제이지 않냐. 그리고 내가 달려간 것은 이미 당신을 지나친 후에 혹시 택시가 떠날까 싶어 한 2초 남짓 뛴 것이다. 도대체 뭐가 문제이냐.
그 중년의 남성은 전략을 바꾸었다. 갑자기 택시의 뒷자리에 타고, 자신은 내리지 못한다며 버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후부터는 나에게 성을 내지도,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뒷자리에서 스마트폰만 보고 있었다. 어떠한 말에도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게 실랑이를 벌인 것이 10분 남짓이었다. 조용히 계시던 택시 기사님은 12시부터 1시가 손님이 제일 많은 시간이고 이때 하루치 일당의 많은 부분을 벌어야 하기 때문에 얼른 해결을 봐달라고 하소연하였다. 하지만 그 중년의 남성은 뒷자리에서 일어날 생각도, 심지어는 그 말에 대꾸할 생각도 없어 보였다. 택시 기사님은 하는 수 없이 나에게 사정하기 시작했다. 젊은 사람이 양보 좀 해달라는 식이었다.
기사님이 안쓰러웠기에 그냥 그 택시를 보내주기로 했다. 그리고 그 중년의 남성에게 당신이 억지를 부리는 것 당신도 알고 있으니까 우리의 말에 대꾸도 안 하는 것 아니냐. 내려줄 테니 미안하다고 한마디만 해달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 중년의 남성은 여전히 대꾸하지 않고 스마트폰만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결국 어떠한 사과의 말도 듣지 못하고, 미안해하는 낯빛조차 보지 못한 채 30분을 기다려서 잡은 택시에서 내려야 했다.
하지만 치밀어 오르는 화를 다스리기 위해 나를 합리화할 무언가를 찾아야 했다. 택시 기사님을 배려해준 것이니 괜찮아. 중년의 남성에게 급한 사정이 있었겠지. 그래 택시 기사님 말마따나 나는 젊으니까 양보해야지 등등.
화가 났고 그 마음을 가라앉히는 게 쉽지 않았다. 나를 화나게 했던 것은 중년의 남성이 보여주었던 막무가내식의 행동이었으나, 어떻게 그런 행동이 가능할까를 고민하다 보니 나이가 어리니까 만만하게 보이지 않았겠느냐 라는 결론이 나왔다. 그 중년의 남성이 아무리 막무가내라고 하더라도, 본인 또래의 사람에게 혹은 본인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에 생각이 다다랐다. 그러자 택시 기사님이 나에게 사정하며 했던 “젊은 사람이 좀 참아.”라는 어떻게 보면 관용적 표현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그 한마디를 곱씹게 되었다.
나는 어떤 사회에 살고 있나. 신라의 왕명이 이사금이던 즈음부터 혹은 그 이전부터 우리는 나이 많은 사람을 공경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문화는 그리고 지금까지도 어느 정도 유효한 듯하다. 하지만 오래된 역사와는 별개로 이것이 옳고 간직해야 할 문화인지는 조금 따져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노인들의 많은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지혜로움을 부정하고 싶지 않다. 그들이 살아온 날 동안 우리 사회에 기여했던 많은 것들 또한 인정한다. 그렇기에 정책적인 차원에서 노인들에게 경제적인 지원이나 여러 복지를 제공하는 것 또한 그럴 수 있다고 본다. 왜냐면 복지사회는 경제인구가(주로 젊은이) 내는 세금으로 유년층과 노년층을 위한 지원을 해주는 구조를 갖기 때문이다. 더욱이 노인들은 경제권을 잃는 경우가 허다하고, 건강상에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비교적 많기 때문에 배려가 필요하다는 것은 동의한다.
그렇지만 억지를 부려도 되는 것은 아니다. 무조건적인 존경을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막무가내로 택시의 뒷자리에 앉아서 버티는 후안무치를 인정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나에게 이런 상황은 종종 딜레마로 다가온다. 여느 나이 대의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으로 대해도 괜찮은 건지, 아니면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많은 것들을 눈감아 주어야 하는 건지.
한숨 자고 아침이 되니 화는 다 누그러졌다. 그런데 이런저런 생각이 든다. 만약 누군가가 “여자니까 좀 참아”혹은 “남자니까 좀 참아”라고 했을 때 겪을 수 있는 상황과 “젊으니까 좀 참아”라고 했을 때 겪을 수 있는 상황이 많이 다르구나.
또한 저자의 진의는 그것이 아니었지만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 제목이 주는 폭력성과 “젊으니까 좀 참아.”라는 관용적인 말이 주는 폭력성이 조금 닮아 보이기도 한다. 뭔가 잡생각이 든다.
골치가 아프고 생각할 여지가 많아 보이지만, 기분 탓이려니 하며 글을 끄적거리다가 마무리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