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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으른씨 Apr 21. 2021

직장에서 만난 도른씨 Ep.1

‘똥군기’에 대하여

나의 첫 직장은 모 방송사의 편성팀이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소위 말해 군기를 잡는답시고 상당히 비정상적인 일들이 가득한 곳이었지만, 25살의 사회 초년생에게는 사회생활은 다 이런 건 줄 알았다. 가장 힘든 일은 ‘먹고 마시는 일’이었다. ‘입사’를 한 건지 ‘입대’를 한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난 스트레스를 받으면 식욕이 떨어지고 살이 빠지는 체질이다. 강도 높은 업무로 12시 전에 퇴근할 날이 거의 없던 터라 입사 한 달 만에 역대 최저 몸무게인 38kg까지 빠진 상태였다. 반면, 나의 사수들은 먹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타입이었으며 나날이 불어나는 체중에 몹시 예민해져있었다. 나날이 체격 차이가 커지자 알 수 없는 이유로 그들의 ‘식고문’이 시작되었다.


하루는 김대리가 내 책상에 서브웨이의 쿠키 8개를 쌓아주고선, 이걸 다 먹지 않으면 퇴근할 수 없다는 억지를 부렸다. 쿠키를 좋아하지 않았던 터라 정중히 거절하고 팀원들과 나눠먹길 제안했지만 더 강하게 윽박지르기 시작했다. 언쟁하고 싶지 않기에 쿠키를 쌓아둔 채 우선 일에 집중했고 외부 미팅이 잡혀 사무실을 나갈 채비를 했다. 그런데 갑자기 김대리가 내 앞을 가로막는 게 아닌가. 선배 말을 무시하냐며 쿠키를 기어이 내 입에 넣었다. 미팅에 늦기 싫으면 먹어야 하지 않겠냐며 비아냥 거리기 시작했다. 그대로 쓰레기통에 버렸으면 되었을 것을 나 또한 처음 겪는 일이기에 아주 멍청하게도 꾸역꾸역 먹었다. 미팅 장소로 가는 길, 결국 난 지하철 화장실에서 다 토하고 말았다.


팀 비용으로 다 같이 점심을 먹으러 간 날이었다. 난 내 몫으로 쌀국수 한 그릇을 주문했고, 원래 먹는 양이 적은 터라 다 먹지 못하고 남겼다. 남긴 쌀국수를 보자 역시나 기다렸다는 듯 김대리의 잔소리가 시작되었다. 그러고는 갑자기 사이드 디시의 남은 스프링롤들을 끼워 내 입에 쑥 집어넣는 게 아닌가. 난 또다시 멍청하게 먹고 토하게 되었다. 그 이후 김대리는 식고문에 재미를 들인듯했다. 과자며 빵이며 살찌는 음식들을 주며 막무가내로 강요했다. 주변의 다른 사수들까지 동참하여 먹지 않으면 성의를 무시하는 무례한 사람으로 나를 몰아갔다. 그렇게 억지로라도 먹을 수밖에 없는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나는 소위 말해 ‘팀의 평화’를 위해 먹고 토하기를 반복했다. 오히려 살은 더 빠져만 갔고 식도염까지 얻게  되었다.


그렇게 이직하기 전까지 미련하게도 1년을 더 버텼다. ‘식고문’을 벗어난 나의 새로운 직장에는 또 다른 형태의 군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신입 사원은 갖추어진 이미지가 중요하다는 이유로 한 겨울에도 패딩 대신 코트를 입고, 기모 스타킹 대신 살색 스타킹을 신고, 높은 힐을 신어야 했다. 말도 안 되는 규정은 입사한 지 1년 후에나 해제되었다. 한 주에 한번 있는 캐주얼 복장 날에 후드티를 입고 머리카락을 높게 묶어서 혼난 일은 잊을 수가 없다. 맨투맨티는 되지만 모자가 달려있다는 이유로 후드티는 격식이 없어 보이고 머리카락을 높게 묶는 것은 회사에 놀러 온 이미지로 보인다고 혼난 것이다. 지극히 본인들의 주관적인 기준을 들이밀며 사수들이 나를 혼내는 일이 반복되자 ‘난 조직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부적응자인가’라는 생각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해할 생각 말고 까라면 까야지’라는 마음으로 그렇게 또 4년을 더 보내게 되었다.


또 한 번의 이직을 통해 건강한 조직문화를 구축하는 직무를 다루고 있는 지금, 나의 지난 직장 생활을 돌이켜보면 얼마나 병든 조직문화에 감염되어 있었던가 끔찍하다. 말도 안 되는 ‘똥군기’에 대해 맞서 싸우지 못함은 학습된 무기력 때문일 텐데 이를 극복해볼 시도조차 하지 않았음이 늘 부끄러웠다. ‘똥군기’를 강요하는 도른씨들 덕분에, 이젠 부조리한 상황에서 누구보다도 먼저 ‘이건 아니죠’라고 말할 줄 알게 되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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