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가회동 집

by 고동운 Don Ko

아이가 셋이고, 처가 식구, 그리고 동생까지 있으니 좀 더 큰 집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 무렵 부자동네였던 가회동에 제법 큰 이층 집을 사서 이사를 갔다. 위쪽으로는 이화여대 총장직에 있었던 김활란 박사가 살았고 아래로는 해군 준장이 살았다. 그 집에도 내 나이 또래의 아들이 있었다. 그 아이를 만난 기억은 없지만 담을 가운데 두고 서로에게 군가를 가르쳐 준 기억은 있다. 나는 그 아이에게 “우리들은 대한의 바다의 용사…”로 시작하는 ‘나가자 해병대’를 가르쳐 주었고, 그 아이는 내게 “우리는 해군이다. 바다의 방패…”로 시작하는 ‘해군가’를 가르쳐 주었다.


우리는 가회동 집에서 제법 알콩달콩 살았던 것 같다. 집에는 늘 가정부가 있었고 아버지의 전령과 운전병이 드나들었다. 군인이 끗발을 날리던 시절이다. 서민들은 꿈도 못 꾸는 냉장고와 TV를 남들보다 앞서 들여놓았다. 일본에서 수입을 하여 고위직 공무원과 연관급 군인들에서 우선 판매를 했던 것 같다. 아버지는 가끔씩 미군 고문관들을 집으로 초대하여 식사를 대접하고 동양화가 그려진 족자 등을 선물로 주기도 했다.


아침이면 어머니는 해병대 정복을 입고 출근하는 아버지의 넥타이를 매어 주었고, 나와 내 동생은 경례로 배웅을 했다. 나는 지금도 김광석이 부르는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를 들으면 그때가 생각난다. “곱고 희던 두 손으로 넥타이를 매어주던 때, 어렴풋이 생각나오. 여보, 그때를 기억하오…” 그래서 어머니 장례식을 위해 마련한 슬라이드의 배경음악으로 이 노래를 넣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버지는 제법 엘리트 직업군인의 길을 걷고 있었던 것 같다. 오키나와, 필리핀, 미국 등으로 출장을 가기도 하고 교육을 받으러 가기도 했다. 출장에서 돌아올 때는 누이면 눈을 감고 세우면 눈을 뜨는 눈썹이 긴 인형, 배터리를 넣으면 불을 번쩍이고 소리를 내며 달리는 자동차 등을 선물로 사 오기도 했었다.


누나는 재동 국민학교에 다녔고, 나와 동생은 아직 학교 갈 나이가 아니었다. 누나의 학예회에 온 식구가 치장을 하고 갔던 일도 기억난다. 봄이 되면 창경원에 벚꽃 구경을 갔고, 여름에는 정릉의 물가로 놀이를 가기도 했다. 나는 물에 들어갈 수 없으니, 나무에 줄을 매고 물에 띄운 작은 고무보트 안에서 물장구를 치던 기억들이 있다. 누나가 소풍을 가는 날이면 어머니는 우리 몫의 도시락을 따로 쌌다. 일찍 퇴근한 아버지와 함께 집 근처 삼청공원에 가서 소풍 기분을 내며 김밥과 삶을 계란을 먹었다.


나는 어른들의 팔에 안겨 영화관에도 가끔씩 갔던 것 같다. ‘바이킹’이라는 영화에서 죽은 주인공을 배에 실어 바다에 띄워 보내다가 불화살을 쏘아 불태우는 마지막 장면, ‘노인과 바다’에서 노인이 사투 끝에 잡은 고기를 배에 달고 돌아오는데 항구에 닿을 무렵에는 뼈만 앙상히 남은 장면, 만화영화 ‘피노키오’에서 피노키오가 고래의 배에 들어가는 장면 등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부모님들은 영화를 매우 좋아했던 모양이다. 어머니가 50-60년대 한국에서 상영했던 영화의 전단지와 포스터를 모은 것이 괘 많이 있었는데, 미국에 이민을 오며 버리고 온 모양이다. 지금껏 가지고 있었더라면 제법 돈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 가족들의 나들이는 가회동 집을 떠나며 중단되었던 것 같다. 주말이면 놀 수 있는 군인과 달리 개인사업을 하며 시간을 내기가 힘들기도 했겠지만 더 이상 안고 다니기에는 내가 너무 커버린 탓이 아니었나 싶다. 데리고 다니기에는 힘이 들고 나만 집에 두고 다른 형제들만 데리고 어디 가기에는 내가 마음에 걸렸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내 잘못은 아니지만 동생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 집에 살며 참 많은 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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