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의 기억
가자미식해
함경도가 고향이신 아버지 덕에 일찍부터 가자미식해에 맛을 들였다. 잘 다듬은 참가자미를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좁쌀 밥과 무채를 넣고 고춧가루로 버무려 한 1주일 정도 숙성을 해서 먹는다. 주로 겨울에 만들어 먹는데, 한번 맛을 들이면 자꾸 찾게 되는 음식이다.
함경도 출신인 아버지의 외숙모가 잘 만드셨다. 우리는 그녀를 ‘불광동 할머니’라 불렀다. 할머니가 사시던 아버지 외사촌 집에 가면 가자미식해뿐만 아니라 다른 맛난 생선요리도 맛볼 수 있었다. 꾸덕하게 말려 연탄불에 구워 낸 가지미는 고기보다 더 맛있었다. 겨울에 처마 밑에 매달아 얼었다 녹고 다시 얼며 말린 동태를 더운 김으로 쪄서 먹는 동태순대도 있어다. 아버지의 외사촌은 밥은 안 먹고 동태순대만 먹곤 했었다.
아버지가 좋아하는 음식이라면 뭐라도 만들어 드리던 어머니가 가자미식해를 만들었는데, 내가 먹어 보아도 ‘불광동 할머니’가 만든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어머니는 더 이상 가자미식해를 만들지 않고 가끔 할머니가 만든 것을 얻어다 먹었다.
미국에 사는 할머니의 딸이 그 솜씨를 물려받아 겨울이면 아버지에게 한 단지씩 가자미식해를 선물하곤 했었다. 가자미식해를 먹으며 고향을 이야기하던 아버지도, 아버지 외사촌도, 그리고 할머니의 딸인 고모의 남편도 모두 돌아가셨다. 나는 이제 가자미식해를 먹으며 그분들을 생각한다. 내가 죽고 나면 아이들은 어떤 음식으로 나는 생각하게 될까?
안동식혜
안동이 고향인 아내를 만나 안동식혜를 알게 되었다. 고춧가루가 들어가서 살짝은 매콤하고, 엿기름과 감미료가 있어 달콤하고, 생강이 들어가니 생강 맛도 나고, 발효를 시키니 새콤한 맛도 난다. 여기에 고명으로 잣이나 땅콩을 넣어서 먹는다.
안동에서는 모든 잔치에 안동식혜가 등장한다고 한다. 겨울에 먹으면 별식으로 먹을만하다. 그러나 모양새는 영 아니다. 고춧가루를 푼 물에 무채와 밥알이 떠다니는 것이 마치 고춧가루로 무친 무생채 비빔밥을 먹다 남겨 물을 부어 놓은 모습이다.
그러고 보니 요즘 아내가 안동식혜를 만들지 않는다. 혹시나 내 말에 상처를 받았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식혜
‘감주’라고도 부르는 식혜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다. 겨울이 되면 할머니는 엿기름을 내려 갓 지은 밥과 함께 커다란 들통에 넣어 안방의 아랫목이 놓고 담요를 덮어 놓았다. 오며 가며 들여다보다가 밥알이 떠오르기 시작하면 밥알은 건져서 냉수를 부어 놓고 엿기름 물은 솥에 넣어 끓인다. 식힌 물에 냉수에 담가 놓았던 밥알을 한 숟가락 떠 넣으면 하얀 밥이 동동 뜬 식혜가 된다.
밥알을 건져내지 않고 함께 끓이면 ‘감주’가 된다. 맛은 거의 같지만 시각적인 면에서는 차이가 있다. 밥알을 넣어 끓인 감주는 탁하고, 하얀 밥알이 동동 뜬 식혜는 깔끔해 보인다. 밥알을 따로 보관해야 하고 물도 갈아 주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달달하고 구수한 '감주'는 후한 인심을 떠올리게 하고, 하얀 밥이 동동 뜬 깔끔한 모습의 식혜는 흰 옷 입은 단아한 여인을 연상시킨다.
사철 야자수 잎이 무성한 남가주에 겨울비가 내렸다. 이제 곧 겨울이 될 것이다. 기후라는 것이 상대적이라 기온만 보면 어떻게 이걸 겨울이라고 할 수 있나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곳의 겨울도 춥고 밤은 길다. 식혜(해)의 계절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