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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맛의 기억

설탕

맛의 기억

by 고동운 Don Ko

지금은 건강에 해롭다고 천대를 받지만 한때 설탕이 귀하던 시절도 있었다. 할아버지가 운영하시던 상조회에서는 추석과 연말에 설탕이나 미원 세트를 회원들에게 명절 선물로 나누어 주기도 했다. 외가에서는 청량음료 대신 설탕물을 마시곤 했다. 무더운 여름날 냉수에 설탕을 넣고 잘 섞어 마시면 달달하니 시원하고 힘도 났다.


할머니는 딸기나 복숭아를 얇게 썰어 설탕에 절여 놓았다가 화채를 만들어 주셨다. 넉넉히 넣은 설탕은 물에 다 녹지 않고 걸쭉하니 바닥에 고인다. 여기에 떡을 찍어 먹는다. 마른 설탕은 입안에서 바작거리지만 물에 젖은 설탕은 시럽이나 조청 같은 식감을 준다.


잔치나 제사 때 쓰는 과자 중에 설탕을 굳혀서 꽃 모양으로 만들어 물감을 들인 것이 있었다. 입에 넣으면 부서져 입안 가득 설탕 가루가 퍼지고 혀에는 물감이 들곤 했다.


우리 옆집에는 사철 탐스러운 열매가 열리는 레몬나무가 있다. 옆집 할머니는 가끔 레몬을 한 자루 준다. 아내는 레몬을 깨끗이 씻고 얇게 잘라 설탕과 함께 병에 재워 둔다. 레몬 썬 것을 한 켜 넣고 설탕을 한 켜 넣고, 다시 레몬 넣고 설탕 넣고 해서 병을 채운다. 며칠 지나고 나면 하얗던 설탕이 녹아 레몬청이 된다. 겨울에는 레몬차로 마시고, 여름에는 레모네이드를 만들어 마신다. 감기로 목이 칼칼할 때, 따듯한 레몬차를 마시면 목이 부드러워진다.


나는 설탕에 대한 이런 달달한 기억들을 가지고 있지만 아내가 기억하는 설탕은 다른 맛이다.


아내가 어머니를 잃은 것은 초등학교 3학년, 11살 때의 일이라고 한다. 학교에서 돌아온 그녀는 쓰러질 듯 마루에 앉아 있는 어머니를 보았다. 가을 추수로 한창 바빠 일손이 달리던 때라 아프다고 마냥 누워있을 수만 없어 들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해 먹이고는 힘에 겨워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어머니는 오랫동안 폐병을 앓고 있었다. 설탕물이라도 마시면 기운을 차릴까 싶어 어머니는 딸에게 가게에 가서 설탕 한 봉지를 사 오라며 심부름을 시킨다. 아내는 아픈 엄마가 빨리 설탕물을 마시고 기운을 차리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단숨에 가게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날따라 가게는 멀게만 느껴졌다. 한참만에 설탕을 사들고 돌아오는데 저만치 집 앞에 사람들이 웅성이고 있었다. 설탕물을 마시고 기운을 차리겠다던 엄마가 삼촌의 등에 업혀 택시를 타고 있었다.


아내가 기억하는 엄마의 마지막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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