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나의 사랑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by 고동운 Don Ko


몇 차례 한국에 다녀온 후, 나름 은퇴계획을 세웠다. 55세가 되면 공무원 은퇴를 하고 한국에 가서 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미국의 공무원 은퇴 연금은 각 지방 정부마다 차이가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입사 연도에 따라 다르기도 하다. 내 경우, 50세부터 은퇴가 가능했지만 연금의 액수가 너무 적었다. 55세에 은퇴를 하면, ‘근무 연한 x 2% x 은퇴 전 1년 평균치 월급 = 은퇴 연금액’을 받게 된다. 62세 이후에 은퇴를 하면 2% 가 2.5% 까지 올라간다.


55세 은퇴를 하고 한국에 나가 근로복지공단이나 관련 부처에서 계약직으로 일을 하며 지내다가 65세에 미국의 국민연금인 ‘social security’를 받게 되면 노후는 큰 걱정 없이 지낼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동안 근로복지공단과 산재 관련 교류를 하며 그쪽 일을 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언질도 받아 두었다. 55세가 되는 해에 막내딸 세미도 대학을 졸업하게 되니 자식 걱정도 덜 수 있으리란 생각이었다.


그렇게 살다가 좋은 사람 만나면 재혼도 할 수 있으리란 기대감도 있었다. 난 그때까지 재혼을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럴만한 기회도 없었고, 사춘기 아이들과 새로운 배우자가 잘 적응할까 하는 노파심도 있었다.


50을 목전에 둔 어느 날, 부모님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동생이 재혼 이야기를 꺼냈다. 그 무렵 동생도 혼자 지내고 있었다. 재혼을 하려면 50전에 해야지 50이 넘고 나면 상황이 달라진다고 했다. 한 살이라도 젊어야 수월하다는 이야기였다. 옳은 말이긴 하지만 연애나 결혼이라는 것이 혼자 마음먹은 대로 되는 일은 아니지 않은가. 웃으며 너나 어서 좋은 사람 만나라고 말해 주었다.


가을이면 만 50살이 되는 해 여름에 아내를 만나, 다음 해 결혼을 하게 되었다.


나의 첫 책을 편집하고 디자인해 주었던 고은경에게서 오랜만에 연락이 왔다. 여름휴가 때 미국에 놀러 온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며칠 후 내가 글을 싣고 있던 타운의 주간지 편집자인 윤정의에게서 연락이 왔다. 한국에서 나도 알고 있는 손님이 오는데, 며칠 안내를 해 줄 수 있겠느냐는 전화였다. 알고 보니 그녀도 은경이를 알고 있었고, 연수를 끝내고 돌아가는 길에 LA로 은경이를 만나러 오는 친구와는 언니 동생 하는 사이였던 것이다.


1주일 머물다 가는데, 첫날 비행장에 마중 나가는 일과 그 후 이틀 정도를 내가 안내하게 되었다. 세차까지 해서 공항에 나가니 은경이가 쇼트커트에 머슴애 같은 외모를 한 낯선 여자와 함께 나왔다. 1년 후 그녀와 결혼을 하게 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시카고에서 온다는 다른 친구 옥순이를 기다려 세명의 여자를 데리고 정의씨네 아파트로 갔다. 짐을 풀고 한인타운에 가서 낙지볶음을 먹고 헤어졌다. 다음날 아침 일찍 그녀들을 데리고 유니버설 스튜디오 관광을 했다. 그리고 타운의 구이집에 가서 소주와 곁들여 저녁을 먹고 헤어졌다. 다음날부터 그녀들은 2박 3일 관광여행을 떠난다. 혼자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커다란 보름달이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갑자기 이제껏 느껴보지 못했던 외로움이 몰려왔다. 그리고 2박 3일 동안 그녀만을 생각하게 되었다. 나의 사랑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1주일이 지나 그녀들이 돌아갈 날이 되었다. 나는 두 번째 책인 칼럼집 ‘지금 뭐하슈?’ 세 권에 그녀들에게 줄 편지를 넣었다. 내용은 3통이 모두 달랐다. 그날 하루를 게티센터에서 보내게 되었는데, 그녀의 전화번호를 입수하는 데 성공했다.


후에 들으니 은경이는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옥순이는 내가 그녀에게 마음을 두고 있다는 것을 짐짓 알고 있었다고 한다. 은경이가 차에 무언가 가지러 간 사이, 옥순이는 슬쩍 자리를 비워 우리 두 사람만 남겨 두었다. 그리고 멀리서 그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두었다.


돌아간 후, 며칠이 지나도 한국에서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은경이에게 잘 갔느냐고 전화를 했더니 대뜸 그녀의 번호를 주랴고 묻는다. 아, 비행기 안에서 무슨 이야기들이 오갔구나.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전화를 했고, 우리들의 연애는 그렇게 시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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