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봄 학기
학기 마지막 과제는 소재를 자유로이 선택해서 그리는 추상화. 움직임이나 소리가 없는 상태를 표현하는 것이다. 지난 학기에도 마지막 과제를 같은 방식으로 그렸었다. 나무, 상자, 유리, 양철 등 다양한 소재가 등장했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골판지를 사용하기로 했다. 골판지 표면의 요철이 주는 효과의 덕을 보려는 것이다.
스케줄에 보니 마지막 수업 한 주 전에는 강의가 없다. 교실에 모여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수업을 대신한다. 이번 그림을 그리는 시간은 그다지 많이 걸리지 않았다. 대신 유화물감을 말리는데 시간이 걸렸다. 초벌을 한 물감이 말라야 그 위에 새로운 물감을 바를 수 있다. 수업에 가도 별로 할 일이 없다. 교수에게 이번 주 수업은 빠지겠노라 양해를 구하는 메일을 보냈다.
요철이 있는 골판지에 붓으로 물감을 바르면 표면이 고르게 덮이지만, 나이프로 물감을 바르면 들어간 부분에는 물감이 묻지 않는다. 즉, 들어간 부분은 네거티브 스페이스가 된다. 주어진 대상에 직접 물감을 바르는 대신 주변에 발라 효과를 내는 것이다.
골판지에 흰색 젯소를 바르고 그 위에 나이프로 물감을 발라 하얀 무니들이 만들어졌다. 골판지 안쪽에 먼저 바른 물감이 마른 후에 바깥쪽에도 같은 방법으로 물감을 올릴 생각이었는데, 며칠 두고 생각을 해보니 반대로 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즉, 들어간 부분에 검은색을 칠하고, 나이프로는 흰색 물감을 바르는 것이다.
젯소가 발라진 표면에 붓으로 어두운 색을 발랐다. 붓으로 바르니 들어간 부분까지 물감이 발라진다. 하루 기다려 물감을 말린 후, 나이프로 흰색을 발라 작품을 완성했다.
유화에서는 냄새가 난다. 기름 섞인 물감이 마르는 동안 다소 비릿한 냄새가 나는데, 나는 이 냄새를 좋아한다. 혼자 속으로는 그림이 익어가는 냄새라고 여긴다.
그림을 그릴 때는 앞치마를 두르고 작업을 하는데, 일에 열중하다 보면 옷이나 휠체어에 물감이 묻기 일쑤다. 아크릴 수업을 들으며 셔츠 두 개에 물감을 발랐다. 빨아도 지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그림 그리는 날은 물감이 뭍은 셔츠를 입는다. 이번 과제를 하면서 물감 뭍은 셔츠를 찾으니 빨래통에 들어가 있다. 조심해야지 하며 새 셔츠를 입고 작업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작업을 끝내고 보니 또 물감이 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