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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이 아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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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동운 Don Ko May 05. 2020

죽음에 대한 공포

이 아침에...

코로나 19로 칩거를 시작한 지 6주째다. 요즘 자주 죽음을 생각한다. 혹시 이러다가 나도 코로나에 걸려 8일 만에 죽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캘리포니아주의 코로나 확진자와 사망자의 50% 이상이 LA 카운티에서 발생했다.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높은 수치다. 그리고 나는 바로 그 LA 카운티에 살고 있다.


한 달 만에 주유소에 기름을 넣으러 갔다. 요즘은 종업원이 넣어주는 풀서비스는 찾아보기 힘들지만, 장애인의 경우에는 아직도 주유를 해 준다. 단골 주유소에 가니 중동계 주인이 마스크도 없이 나온다. '고객을 대하는 사람들은 마스크를 써야 하는 거 아닌가?'


카드를 건네주는데, 말을 걸어온다. “요즘은 집에서 일해요?” 원래 말이 좀 많은 친구다. “Yes”라고 답하고는 얼른 창문을 올렸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내가 마스크를 쓰고 오는 건데 잘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하루 종일 기분이 께름칙하다.


케이블 TV 가 잘 안 나온다. 전화를 했더니 집으로 들어오는 신호가 약하게 나온다며 수리하는 사람을 보내겠다고 한다. 이틀 후로 약속을 잡아 놓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영 마음이 편치 않다. 무증상 감염자도 많다는데, 케이블을 고치려면 거실에 들어와 이것저것 만질 것 아닌가. 아무래도 불안하다. 다시 전화를 해서 약속을 취소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생긴다는 것은 죽을 날이 가까워졌다는 의미가 아닌가 싶다. 죽을병에 걸린 건 아니지만 나이를 계산해 보면 쉽게 결론이 난다. 이제 내게는 1/4 또는 1/5  정도의 세월밖에 남지 않았다. 여행도 가는 길보다는 돌아오는 길이 짧고, 술병에 남은 술도 절반을 넘고 나면 금방 바닥이 난다.


젊은이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남의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신은 불사불멸인 것처럼 행동한다. 그러니 이 와중에 클럽에 가서 땀은 빼며 몸을 부딪치고, 바닷가에 가서 파도타기를 하는 것이다. 10대의 조카딸은 죽음을 마치 헌 옷이나 헌 구두를 대하듯이 말한다. “난 오래 살고 싶지 않아. 멋지게 살다가 적당한 때 죽을 거야.” 한다.


죽기 싫으니까 죽음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만큼 나이가 먹었으니 세금과 죽음은 피할 수 없다는 정도는 나도 안다. 그러나 머리로 아는 것과 가슴으로 느끼는 것은 다르다. 결국 적당히 타협하게 된다. 사는 날까지 살다가 좋은 죽음을 맞자. 


과연 죽는 사람에게 좋은 죽음이 있을까.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지 싶다. 그냥 끝일뿐이다. 내 죽음에 대한 평가는 산자들의 몫이다. 남게 되는 사람들에게 좋은 죽음이란 아마도 앙금 없는 죽음일 것이다. 빚과 상처를 남기지 말아야 한다.


나오던 방송이 안 나오니 갑갑하다. 다시 전화를 해서 다음날 케이블 회사 직원이 나왔다. 마스크는 하고 왔는데, 맨손이다. 장갑은 어디 있느냐고 물으니, 세정제로 손을 잘 닦고 왔다고 한다. ‘인명은 재천이라’ 하지 않았나. 운명에 맡길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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