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_3화

창밖만 바라보았다

by 돈미새

시간은 조용히, 그러나 매섭게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갔다.

세상은 어느새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무렵 한국은, 전 세계를 흔들 만큼 강해진 일본의 기세를 바라보며, 빠르게 변해가는 현실에 스스로를 맞추려 몸부림치고 있었다. 일본 정부는 전쟁을 위한 물자와 인력을 요구했고, 그 요구는 생활 곳곳까지 깊이 스며들었다. 사람들은 점점 더 억눌렸고, 마음까지 다듬어야 하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학교 담장에는 낯선 얼굴이 붙은 포스터가 붙어 있었고, 동네 형들은 징용을 피하려는지 욕설을 내뱉으며 골목을 뛰어다녔다. 일본어 수업은 손에 익었고, 일어 교과서를 펼치는 일도 낯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길가에서 흩날리는 종잇조각과 꽃잎을 주워 드는 것처럼, 광복은 문득 다가왔다.

학교 운동장에서는 일본어 교과서를 불태우는 연기가 매캐하게 올라왔고, 아이들은 손바닥만 한 새 교과서에 서투른 글씨를 적으며 들떠 있었다. 거리에서는 나막신 대신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딱딱한 워커 소리가 곳곳을 울렸다.

그러나 나에게 해방은 기쁨보다 먼저 허망함으로 다가왔다. 잔치인 줄 알았는데, 눈을 떠보니 장터는 더 조용해져 있었다. 나막신은 여전히 팔리지 않았고, 사람들의 시선은 장터가 아닌 트럭과 화폐, 매연에 더 쏠려 있었다.

경제는 휘청거렸고, 변화를 감당하기에는 세상도, 사람들도 지쳐 있었다. 특히 우리 집 같은 가난한 이들은, 혼란이라는 소용돌이 속에서 오히려 더 깊게 흔들리고 있었다.

일을 찾는 사람이 눈에 띄게 늘어나면서, 시장의 분위기는 더욱 불안정해졌다. 나 역시 여전히 나무를 자르고 나막신을 만들며 집안을 돕고 있었지만, 거리에는 일거리를 찾는 사람이 넘쳐났고, 나막신을 신던 사람들은 점점 사라졌다.

일본인이 운영하던 군화 공장에서는 이제 한국인들이 비가 오는 날에도 신을 수 있는 구두를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시대가 변하는 만큼, 내가 벌어오는 돈도 점점 줄어들었다. 어머니의 일도 끊기는 날이 많아져 집안 형편은 더 어려워졌다.

학교도 사정이 좋지 않았다. 선생님들 월급조차 제때 지급하기 힘들 만큼 상황이 나빠지며, 학급비를 더 걷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날마다 얼굴에 근심을 짙게 드리우고 생활하셨고, 우리 집은 식사 한 끼 챙기기도 버거운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서서히 깨달았다. 이제는 더 이상 학교에 다닐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처음엔 어머니께 차마 말씀드리지 못했다. 하지만 어느 날, 마음속에서 더는 버티기 어려운 순간이 찾아왔다.

그날, 학교에서 나는 발바닥 굳은살이 다시 욱신거리는 것을 느꼈다. 교실 뒤에 종일 서 있어야 했고, 월사금을 내지 못해 친구들 사이에 끼지 못했다. 숨이 막혔고, 수치심이 몸 안을 꾹꾹 찔러댔다. 나는 결국 몸을 돌려 학교를 나왔다.

집에 돌아온 나는 입술을 깨물고, 어머니를 마주 보았다.

어머니는 눈물을 닦지 않았다.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내 교복 소매를 거칠게 잡아당겨 손목에 낀 때를 확인하더니, 단단히 박혀 있던 단추를 칼로 툭툭 끊어내기 시작했다.

“남 줄 거다. 너한텐 인제 소용없다.”

그 위로 떨어진 것은 눈물이 아니라, 내일 팔아야 할 단추들의 마른 광택뿐이었다.

나는 단추가 뜯기는 순간, 서늘한 칼날 같은 감촉이 손가락 끝을 스쳤다. 그것은 교복이자, 학생으로서의 나 자신이 단번에 잘려 나가는 느낌이었다.

나는 속옷 차림으로 방 한구석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보따리에 싸인 교복 안에는, 내가 그토록 지키려 했던 연필 향기와 흑연 맛도 함께 갇혀 있었다. 학교라는 공간, 공부라는 기쁨, 학생으로서의 나 자신—모든 것이 단번에 뺏겨버린 순간이었다.

나는 떨리는 손을 주먹으로 움켜쥐며, 남은 시간과 몸을 다시 계산했다.

그날 밤, 호롱불이 바닥을 어슴푸레 밝히고 있었다.

책을 펼칠 수는 없었다. 이제 내 손끝에 남은 것은 글자가 아니라, 다시 단단해질 굳은살뿐이었다. 나는 지게 끈을 어깨에 걸어보았다. 며칠 쉬었다고 어깨가 가벼워진 것이 오히려 죄스러웠다.

책 대신 숫돌을 꺼내 낫을 갈았다. 서걱거리는 쇳소리가 밤공기를 갈랐다.

손바닥에 남은 굳은살과 마디마디의 욱신거림은, 내일 다시 베어야 할 나무의 형상을 떠올리게 했다.

나는 어둠 속에서 눈을 감고, 글자를 대신해 내일의 나무들을 마음속으로 새겼다.

누군가는 이 시간을 공부로 채웠겠지만, 내 현실에는 학교도, 공책도, 연필도 없었다.

그저 살아남기 위한 몸과, 다시 살아갈 손끝만이 있었다.

새벽이 오면 나는 다시 산으로 향할 것이다.

낫을 쥐고, 지게를 지고,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마음속 한켠에서는, 학교와 글자, 배우고자 했던 모든 것들이 여전히 무겁게 달라붙어 있었다.

월, 수, 금 연재
이전 09화국민학교_2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