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어진 길
학교에 가지 못하게 된 뒤에도 나는 마음속에서 그곳을 쉽사리 놓지 못했다.
사람의 마음이란 묘해서, 멀어진 길일수록 더 또렷해지고, 닿지 못하는 문일수록 더 간절해지는 법이었다. 내게 학교는 그런 자리였다.
광복 직후의 거리는 늘 혼란과 피곤함으로 가득했다. 시장 앞에는 먹을 것을 찾는 사람들의 줄이 끝없이 이어졌고, 어디선가 다툼이 터지면 모두가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 속에서 나는 학교에서 배운 글자와 숫자보다 먼저, 하루를 견디는 법을 배워야 했다. 일거리가 끊기지 않는 날이면 감사해야 했고, 운이 없는 날엔 빈손으로 집에 돌아오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렇게 버티는 동안, 나는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변해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은 언제나 학교를 향해 붙잡혀 있었다.
밭일을 서둘러 끝낸 날이면 흙 묻은 손을 바지에 몇 번 훔친 뒤 태연한 얼굴로 마을 길을 걸었다. 하지만 내 발끝은 늘 같은 방향으로 향했다.
담장 너머로 바람이 스치면 분필 가루 냄새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아이들이 책장을 넘기는 바스락거림이 귓가에 겹쳐 들렸다. 나는 담장 가까이 다가가, 비스듬히 열린 창문 틈을 조용히 들여다보곤 했다. 햇빛은 아이들의 머리 위를 천천히 쓰고 지나갔고, 교사는 굵은 분필을 손에 쥐고 칠판 앞으로 걸어 나왔다.
분필이 칠판에 닿을 때 울리는 단단한 소리는 마치 갓 캐낸 고구마 속살처럼 투박하면서도 묘하게 포근했다.
그 순간, 나는 내가 잃어버린 세계가 얼마나 소중했는지 다시 실감했다. 그러나 돌이킬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돌아서는 길,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래도 살아야 한다. 오늘 일을 마저 해야 한다.”
혼란스러운 거리 속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나는 그 소리를 듣는 동안만큼은 학교에서 멀어진 아이가 아니라 교실 한 귀퉁이에 조용히 걸터앉은 아이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바람이 지나가 아이들의 웃음이 창문을 통해 흩어져 나가는 순간, 그 따뜻한 소리는 곧 차갑게 식었다.
나는 금세 밖에서 훔쳐보는 아이라는 사실을 또렷하게 깨달았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햇빛이 푸르게 번지고, 먼지가 햇살 속에서 금빛으로 흩날리던 낮이었다. 나는 그 빛을 피해 창가에 몸을 낮추고 조금 더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교사는 오늘도 산수를 설명 중이었고, 아이들은 숨을 삼킨 채 칠판을 따라가고 있었다. 내가 가장 그리워하던 장면이었다.
귀까지 뜨거워졌지만, 발끝으로 살짝 서서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 순간만큼은, 들키더라도 한 번만 더 보고 싶었다. 칠판에 쓰여 가는 숫자들, 손을 들어 질문하는 아이들, 공책에 줄을 긋는 소리까지 모두 잊을 수 없는 풍경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때였다.
교사의 손이 공중에서 멈추고, 분필 가루가 허공에 흩어진 채 그대로 얼어붙었다. 교사의 얼굴이 천천히 창문 쪽으로 돌아왔다. 그의 눈이, 마치 무언가를 정확히 포착하려는 새처럼 가늘어졌다.
나는 숨이 턱 막혀 들이쉰 공기가 목에서 멈춘 듯했다.
‘혹시… 나를 본 건가?’
심장이 쿵 하고 크게 내려앉았다.
도망쳐야 할지, 아무 일 없다는 듯 서 있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내 다리는 흙바닥에 붙어버린 듯 움직이지 않았다.
‘왜 나는 여기 서 있어야 하는가.’
‘왜 저 안에 있을 수 없는가.’
‘내가 잘못한 게 무엇이었나.’
바람이 한 번 더 흔들리며 창문 틈을 벌렸다. 교사는 아주 미세하게 고개를 갸웃한 뒤 다시 칠판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제야 나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나 깊은 숨을 내쉬었다. 안도였는지, 더 큰 상실감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단 하나 확실한 것은, 교실 안과 바깥의 거리는 단순한 공간의 간격이 아니라 내 삶과 꿈 사이의 간극이라는 사실이었다.
그 깨달음이 채 가라앉기도 전, 일이 벌어졌다.
내가 뒤로 물러서는 소리가 들렸던 걸까. 아니면 바람이 나뭇가지를 밀어 더 분명한 기척을 냈던 걸까. 교사는 다시 창가 쪽으로 시선을 던졌고, 이번엔 확실히 무엇인가를 포착한 듯 움직임을 멈췄다.
천천히, 오래 굳어 있던 흙덩이가 굴러오기 시작하는 듯한 무거운 기세로 창문 쪽으로 다가왔다.
“이 거렁뱅이 놈이 어딜 넘겨다 봐!”
그 소리와 함께 바람이 갈라졌다.
퍽. 고개가 옆으로 꺾이는 순간, 귀가 먹먹해지고 뺨에서 비릿한 피 냄새가 올라왔다. 이어 반대편 뺨으로 거친 손바닥이 날아왔다. 낫질로 굳은 내 살갗보다 교사의 손바닥이 더 단단하고 차가웠다.
입안에선 금속 냄새가 번졌고, 고개를 들자 눈앞에 칠판 위 숫자들이 바닥으로 쏟아지는 듯한 환상이 스쳤다.
더 무서운 건, 창틀에 매달린 수십 개의 눈동자였다. 어제까지 숨을 나누던 친구들, 깨끗한 옷을 입은 짝꿍, 그들의 눈초리는 경멸과 호기심으로 빛났다. 내 존재는 한순간, 교실을 더럽히는 불청객이 되어 있었다.
교사는 내 멱살을 잡고 흔들며 훈계했지만, 내 귀에는 아무 말도 들어오지 않았다. 분필 가루와 피가 섞인 얼룩을 바라보며, 훔쳐보던 배움의 장이 이렇게까지 나와 멀어졌음을 실감했다.
교사는 나를 마당 밖으로 밀쳐냈다. 나는 뺨에 묻은 분필 가루를 닦지 못한 채 장터 쪽으로 도망치듯 뛰었다. 배움의 문턱을 훔쳐보던 소년은 그곳에 없었다. 창틀 너머의 세계가 닫히는 소리가 등 뒤에서 비수처럼 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