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아직도 조선에 살고 있는가

실용주의를 오해한 사회, 민주주의를 감당하지 못하는 시민

by 돈미새


내가 좋아하는 최진석의

이야기를 정리해보려고 한다.


그의 실용주의적 생각은

나에게 많은 생각과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우리가 매일 쓰는 돈에 담긴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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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대한민국 화폐를 떠올려보자.


그 지폐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조선시대 사람들이다.


세종대왕, 율곡 이이, 신사임당.


대한민국은 분명 근대 국가다.


헌법이 있고, 법률이 있고,

민주주의 제도를 채택한 국가다.


그런데 가장 현대적인 매체 중 하나인

‘화폐’에는 전근대 국가의 인물들이 자리하고 있다.


일본은 메이지 이전 인물을

화폐에 올려놓지 않는다.

미국과 영국도 마찬가지다.


중국 역시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전 왕조 인물을 화폐에 쓰지 않는다.


이 차이는 단순한 디자인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나는 이것이 우리가 여전히

어떤 의식의 층위에서는

조선 속에 살고 있다는 상징이라고 생각한다.




근대 국가는 되었지만, 근대인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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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제도적으로는 근대 국가다.


하지만 삶의 태도와 사고방식에서는

전근대적 관습과 집단의식이

여전히 강하게 작동한다.


근대 국가를 떠받치는 핵심은 분명하다.


법, 이성, 개인, 시민 의식이다.


그런데 우리는 법으로 사는

삶을 종종 ‘차갑고 계산적인 것’으로 느낀다.


반대로 감정, 연대, 함께함, 공동체적 정서는

더 인간적이고 도덕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개인의 자율성이 충분히

성숙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연대는, 매우 쉽게 맹목적 집단주의로 변질된다.




개인 없는 연대는 왜 위험한가




연대와 함께함은 분명 아름다운 가치다.


그러나 그것이 개인의 판단과

책임 위에 서 있지 않다면,
결국 “우리 편이냐 아니냐”로

세상을 나누는 방식으로 귀결된다.




“진영에 갇혔다”는 말의 진짜 의미

오늘날 한국 사회를 설명할 때

자주 등장하는 말이 있다.


“너무 이념적이다”,

“진영에 갇혀 있다”는 말이다.


이념성이 강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경험과 실험보다 미리 정해진 원칙과

집단의 기준을 우선한다는 뜻이다.


개인은 자신의 경험과

판단을 통해 생각하기보다,
먼저 봉사해야 할 집단을 선택하고


그 집단의 언어와 감정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때 사회는 과학적·경험적 검증이

작동하기 어려운 구조가 된다.


갈등은 조정되기보다 증폭되고,
토론은 설득이 아니라 적대가 된다.




우리가 실용주의를 오해하는 이유



이 지점에서 우리가 자주 오해하는 개념이 하나 있다.
바로 ‘실용주의’다.


한국에서 실용주의는 흔히 이렇게 이해된다.


결과만 중요하게 보는 태도


원칙 없는 실리 추구


얄팍한 성과주의


하지만 철학적 의미의 실용주의,
즉 프래그머티즘(pragmatism)은 전혀 다르다.


실용주의는
‘어떤 것이 옳은가’를 먼저 정해두고

집행하는 태도가 아니다.


가설을 세우고,
실험하고,
그 결과를 관찰하고,


다시 수정하는 과정 자체가 진

리를 만들어간다는 태도다.


실용주의에서 진리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진리는 과정 속에서, 경험 속에서, 점진적으로 드러난다.

ChatGPT Image 2025년 12월 30일 오전 09_58_27.png 찰스 퍼스 & 윌리엄 제임스


그렇다면 질문은 이것이다.


왜 우리는 실용주의를 이렇게

오해하게 되었을까?


이유는 단순하다.


우리는 실용주의가 태어날 수 있는

역사적 경험을 거의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중국과 일본은 아편전쟁과 개항을 통해
서구에 ‘완패’한 경험을 했다.


그 충격 속에서 그들은 깨달았다.


기술만 따라잡아서는 안 된다.
제도만 바꿔서도 안 된다.


진짜 힘은
과학적 세계관과
철학적 사고에 있다는 사실을.


그래서 중국과 일본은
과학과 철학을 체계적으로 학습했다.




우리는 ‘이식’만 받아왔다



반면 조선과 대한민국은 어땠을까.


우리는 이런 인식 전환의 과정을 거의 거치지 못했다.


과학혁명도, 경험주의 전통도,
스스로 사유하며 세계를 재구성하는 과정도 없이
근대의 제도와 개념을 ‘이식’ 받았다.


여기에 또 하나의 문제가 겹친다.


바로 번역이다.


한국은 지식 생산국이 아니라

지식 수입국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스스로 개념을 번역해 내는

단계에도 이르지 못한 채
일본에서 번역된 근대 개념을

다시 수입해 사용하는 사회다.



개념은 사고의 틀을 규정한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photography를

‘사진(寫眞)’이라고 번역했다.


‘참을 베낀다’,

‘대상을 사실적으로 재현한다’는 뜻이다.


이 개념 속에서 사진가는
기록자나 기술자가 되기 쉽다.


하지만 photography는
‘빛(photo)이 자신을 그린다(graphy)’는 의미다.


이 개념 속에서 사진가는
빛의 표현을 다루는 예술가가 된다.


같은 행위라도
어떤 개념으로 이해하느냐에 따라
사고의 방향과 정체성은 완전히 달라진다.




민주주의는 정답이 아니다



민주주의 역시 마찬가지다.


민주주의는
완성된 정답을 집행하는 체제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끊임없는

실험과 조정의 과정이다.


하지만 그 과정은
성숙한 개인을 전제로 한다.


계몽주의, 개인주의, 시민혁명의 경험 없이
민주주의를 받아들인 사회에서는
개인주의가 이기주의로 오해되고,


시민은 책임 있는 주체가 아니라
권리만 요구하는 존재로 전락하기 쉽다.



감정과 집단의식이
법과 이성을 대신하면
민주주의는 쉽게 마비된다.




이제는 조선을 넘어서야 할 때



결국 문제는 제도가 아니다.


문제는 시민의 교양이다.


실용주의는 원칙을 버리는 태도가 아니다.


원칙을 만들어 가는 태도다.

민주주의는 갈등이 없는 사회가 아니다.
갈등을 실험과 합의로 다루는 사회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더 강한 이념도,
더 뜨거운 연대도 아니다.


법과 이성 위에 선 성숙한 개인,
시민으로서의 자기 책임 의식이다.


우리가 정말 근대 국가로 살고자 한다면,
이제는 조선을 기념하는 데서 멈추지 말고
대한민국 시민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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